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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나는 믿나이다: 평화, 맨몸의 예언자,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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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3 ㅣ No.274

[나는 믿나이다] 평화, 맨몸의 예언자, 그리스도인

 

 

지난 호에서 교회의 가르침은 교회와 세상, 하느님 나라와 세상, 교회의 가르침과 세상의 질서, 그리고 신앙과 생활이 소통할 수 없는 이질적인 별개의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였다.  가톨릭교회가 “신앙교육을 위한 확고한 규범이며 교회의 친교를 위해 유효하고 권위 있는 도구”로 내놓은 “가톨릭교회 교리서”(1992년, 이하 “교리서”로 표기)는 전통적인 옛 순서를 따라 신경, 전례,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다루면서 이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룬 제3편의 제2부 제2장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생각하기에 불편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자.

 

 

1. 불편한 가르침 - 평화

 

어느 기회에 ‘평화’라는 주제를 놓고 강의를 할 일이 있었다. 전문적인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해 내용이 조악하여 그랬을 수도 있겠으나, 가장 먼저 나타난 반응은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였다. 청중이 지적한 ‘그런 식’은 무엇이었을까?

 

교회는 ‘평화’에 관해 두 갈래의 전통적 가르침을 유지해 왔다. 하나는 ‘비폭력 평화주의’라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정당한 전쟁론에 입각한 소극적 평화주의라 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정당한 전쟁이라 함은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전제 아래 침략이 아닌 정당방위를 목적으로 무력사용을 수반하는 전쟁을 권리로서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두 갈래의 가르침이 있다고 했으나, 역사는 비폭력 평화주의의 가르침보다는 정당한 전쟁론이 대세를 이루고 전승되어 왔음을 잘 보여준다.

 

이 정당한 전쟁론은 곧잘 침략전쟁 또는 예방전쟁을 미화시키는 도구로 악용되어왔으며, 오늘날 대량살상무기를 경쟁적으로 개발 보유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쟁은 그 자체로 인류의 공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교회라도 ‘비폭력 평화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 강의의 줄거리였다.

 

청중들이 보인 반응은 대체로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런 식’으로 말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는데, 그 근거는 우리의 남북 분단 현실에서 비폭력 평화주의는 가당치도 않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그런 현실적인 예민한 문제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을 교회의 가르침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시는 분도 있었다. 과연 비폭력 평화주의의 가르침이 가당치않으며, 교회가 목소리를 낼 분야가 아니며,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한 것인가?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만도 아니고, 적대 세력들 사이의 균형을 보장하는 데 그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선익보호,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사람들과 민족의 존엄성 중시, 형제애의 끊임없는 실천 등이 없이는 평화는 지상에서 실현될 수 없다. 평화는 ‘질서의 고요함’이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며 사랑의 결실이다”(“교리서”, 2304항).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는 “간추린 사회교리”(2004년)를 발간하였다. 교우들에게는 ‘사회교리’라는 표현조자 생소하다. 교회는 이 교리서를 통해 비록 정당한 전쟁론의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평화’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비교적 상세하게 강조한다. 교리서는 평화를 하느님의 속성으로, 정의와 사랑의 열매로 가르치면서 전쟁을 평화의 실패로 규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 세계도 흔히 조소의 대상인 맨몸의 예언자들의 증언을 필요로 한다. 난폭하고 무자비한 행위를 포기하고,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취하는 방어수단을 택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사랑을 증언하는 이들이다. … 그 사람들은 폭력에 의지하는 것이 파괴와 죽음을 포함하여, 대단히 큰 물질적, 정신적 위험을 몰고 온다는 것을 정당하게 증언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96항)고 칭송하고 있다. 분명히 교회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불편하게 하는 구체적인 가르침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은 무기의 비축을 가상의 적에게 전쟁을 단념하도록 하는 역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국가들 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유효한 것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 군비 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있다. … 새로운 무기를 마련하는 데에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의 낭비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막고, 민족들의 발전을 방해한다”(“교리서”, 2315항).

 

우리는 ‘조소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한다. 복음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을, 대놓고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비현실적인 이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무력증강을 통해 감히 누구도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비폭력 평화주의는 꿈에서나 동경하는 ‘이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게 믿는다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것도 신앙 자체를 말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님을 다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철저한 비폭력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당신 스스로를 구하고자 ‘정당방위권’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당신을 보호하려고 칼을 빼든 제자를 꾸짖으시며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살리지도 못하는”(마르 15,31 참조) 조소의 대상이 되셨다.

 

교리서가 정당방위의 권리를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비폭력평화주의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폭력 평화주의는 아주 쉽게 한편으로 밀어 넣고 고집스럽게 정당한 전쟁론에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이 불편하고 혼란스럽다면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간추린 사회교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첫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을 신앙으로 고백한 “성경”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깊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다.

 

 

2. 우리가 성찰할 몇 가지 예민한 문제들

 

가톨릭교회가 평화와 전쟁에 대해 이렇게 명시적으로 가르치고 있음에도, 우리는 현실 문제에 맞닥뜨리면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세속의 논거에 의존하여 자신의 태도를 결정한다.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가르침 곧 교리에 근거하여 태도를 취하지 않는 셈이다. 그 예를 두 가지만 들어보도록 하자.

 

2-1. 이라크 파병에 대하여

 

지난해 12월 28일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자이툰 부대의 파병기한을 내년 12월 31일까지 1년 더 연장하는 내용의 ‘국군 부대의 이라크 파견연장 및 임무종결 계획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이라크 주둔 자이툰 부대는 2008년 말까지 이라크 아르빌 현지에 더 머물게 되었다.

 

교회는 무력사용이 도덕적으로 허용되려면 엄격한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그 조건들이란 다음과 같다.

 

“공격자가 국가나 국제 공동체에 당한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해야한다. 이를 제지할 다른 모든 방법이 효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성공의 조건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제거되어야 할 악보다 더 큰 악과 폐해가 무력 사용으로 초래되지 않아야 하며, 현대 무기의 파괴력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교리서”, 2309항).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서 명분으로 삼은 것은 ‘정당방위’가 아니라 이른바 ‘예방전쟁’이었다.

 

이라크의 불의한 독재 권력이 이라크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며, 더 나아가 테러리즘을 배후에서 지원하며,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여 세계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에 국제질서를 지키고 세계 평화를 위해 그 악을 제거해야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이미 미국 국민을 포함해 인류의 공감과 동의를 잃은 침략전쟁으로 밝혀졌다.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지도 못했으며, 테러를 지원했다는 증거도발견하지 못했으며, 피해가 계속적이며 심각하다는 주장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라크 전쟁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는지, 용납해서는 안 될 무력 침략인지 그 성격을 진지하게 성찰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국익을 앞세워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아직 철군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침묵했다.

 

2-2. 양심상의 이유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이들에 대하여

 

교회는 “군인 생활로 조국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한 역군이다. … 그들은 참으로 국가의 공동선과 평화 유지에 기여하는 것”(“교리서”, 2310항)이라 가르치면서, 동시에 “양심상의 이유로 무기 사용을 거부하며 다른 방법으로 인간 공동체에 봉사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국가가 공정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교리서”, 2311항)을 분명하게 요구함으로써 이른바 ‘대체복무’의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전쟁을 치른 후 남북이 휴전 상태인 현실에서, 군복무는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수호하고 국가의 공동선과 평화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국민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종교적인 이유 또는 평화에 대한 신념으로 군복무를 대신하는 이른바 ‘대체복무’의 기회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대체복무를 못마땅해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체복무를 통해 국가의 공동선과 평화 유지에 기여하겠다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조소하고 비난하며 법적으로 처벌하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 비폭력 평화주의는 꿈에서나 동경하는 ‘이상’에 불과한 것인가?

 

[경향잡지, 2008년 2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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