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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나는 믿나이다: 교회,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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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3 ㅣ No.273

[나는 믿나이다] 교회,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사

 

 

1992년 우리 가톨릭교회가 내놓은 "가톨릭교회 교리서" 내용을 개관하는 이 연재를 통해 경향 독자들의 얼굴(신앙 곧 삶)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닮아가는 데작은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다.

 

 

신앙생활, 부담스럽고 자랑스럽다?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에 입교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여긴다. 다니고 싶다고 해서 바로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교리를 배워야 하고, 기도문도 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토록 어렵게(?) 입교를 했다고 해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르고 지켜야 할 교회의 가르침이 많다고 생각한다. 반면 기존의 교우들은 그 까다로움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한다.

 

이렇게 입교 자체도 신앙생활 그 자체도 마음 내키는 대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고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는 부담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이미 신앙생활을 하는 이에게는 부담이자 자랑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부담과 자랑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먼저 일정기간 교리를 받고 입교한 분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무엇을 배웠는지 잘 모르겠다.”거나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앞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밝힌다.

 

말하자면 교회의 가르침의 내용을 어렵다고 여긴다는 것인데, 그마저도 실제로 내용이 어려운 것인지, 교리교수법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예비신자들의 수준이 낮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러한 ‘어려움’은 이미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임을 알게 된다. 필자가 오랫동안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신앙상담을 하고 있는데, 교우들이 질문하는 내용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묵주의 9일기도를 하고 있는데, 사정이 있어서 하루를 쉬었는데 계속해도 되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하는 식이다.

 

열심히 배워도 알지 못하는 것이 부담이라면 그 부담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이상한 규율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그 역시 의미가 없는 자랑이라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느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인류에게 드러내 보이셨다고 교회는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정작 사람들은 도저히 하느님을 모르겠다고 하는 꼴이다.

 

 

신앙, 비신앙의 다른 이름?

 

그 의미 없는 부담과 자랑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분명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일선 사목현장에 비추어 나름대로 성찰하건대 신앙과생활의 철저한 분리, 교회의 가르침과 삶의 철저한 분리 경향 탓이다. 하느님과 세상, 교회와 세상, 교회의 가르침과 세상의 질서, 신앙과 생활을 이질적인 실체로, 그것도 전혀 소통할 수없는 실체로 여기는 탓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성(聖)과 속(俗)의 극단적인 이분법적 신앙 태도는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무질서한 세상에서 정중하게 피신시켜(?) 저 세상에 가두어놓는 비 (非)신앙을 가져온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그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감히 우리가 엿볼 수 없는 하늘나라에만 계신 분이다.

 

하늘 저편에 계신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보고 알려 해도 보고 알도리가 없고, 그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찾으려니 찾을 도리가 없어, 몇 가지 간단한 규율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그 규율을 따르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신앙을 대신한다.

 

이는 마치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이 ‘알 수 없는 신’을 섬기는 것을 두고 설교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면 우리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과 세상, 교회와 세상, 교회의 가르침과 세상의 질서, 신앙과 생활을 그렇게 만날 수 없는 이질적인 두 세계의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아니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사와 같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사를 ‘볼 수 없는 하느님 은총의 보이는 표지’라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난 그리스도 그분의 얼굴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구체적인 표지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그러나 교우들마저 신앙은 성당에서 하는 것이고, 생활은 세상에서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의 가르침과 세상 살아가는 이치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해달라고,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하고 있으나, 그 청은 성당 안에서 맴돌 뿐 정작 ‘이 땅’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이 땅’에는 ‘이 땅’의 나라가 ‘이 땅’의 질서가 따로 있다고 고집한다. 교우들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란 이름으로 가두어놓은 꼴이라 할 수 있다.

 

 

신앙, 그리스도의 얼굴을 드러내는가?

 

그 예를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와 관련하여 최근 세간의 이목을 끈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다룬 ‘나주 율리아’ 고발 프로그램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거대 기업군을 공개적으로 세상에 고발한 일부 사제들의 행동이다.

 

주변의 교우들에게 이 두 사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우선 ‘나주 율리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천주교회에도 그런 사이비 같은 신앙이 있을 수 있느냐!”는 반응이 많았으며, 많은 분이 비판적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교회가 무엇을 하였는가? 교회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며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분들도 있었다.

 

앞의 지적은 가톨릭교회의 엄격한 규율이 훼손되었음을 의미하며, 뒤의 지적은 교회가 이른바 마음의 평화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규율이 훼손되었다는 지적도 마음의 평화를 채워주지 못했다는 지적도 일리는 있다.

 

이 같은 태도는 신앙을 규율 또는 개인적 심리적 차원으로만 보려는 시각을 전제한다. 그러나 성경이 고백하는 예수님께서는 규율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 사랑(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하셨고, 개인적 심리적 차원의 구원을 외면하지 않으시면서 동시에 전인적, 공동체적 차원의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그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교회는 ‘평화’를 단순히 마음의 평화로만 가르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평화는 하느님의속성이며, 구체적으로는 정의와 사랑의 열매라고 가르친다. 평화는 사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나주 율리아’ 자체도 그에 대한 지적도 신앙을 사사로운 것으로 가두어둠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린 것이다. 그것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일부 사제들이 우리나라 거대 기업군을 공개적으로 고발한 것을 두고도 말이 많았다. 대부분 “왜 사제들이 그런 일을 하느냐?”는 태도였다. 교회가 세상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 분들이 상당수였다. 사제는 성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이지 세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 나서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분들은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 방법이 사제답지 않다고 점잖게(?) 꾸짖는다. 역시 일리 있는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일리(一理) 있다’ 함은 역설적으로 그 지적이 온전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교회의 어떤 가르침을 외면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언자는 점쟁이가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성사로서 세 가지 사목목표를 갖고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는 교회의 끊임없는 쇄신, 둘은 세상에 복음적 가치를 스며들게 하는 것, 셋은 세상과의 대화이다.

 

“교회는 곧 하느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하고 묻는다면 앞의 세가지 사명을 수행하는 존재라고 답을 해도 된다. 그리고 사제는 그 일을 촉진하는 그리스도의 봉사자이며 교회의 봉사자다.

 

여기서 세상에 복음적 가치를 곳곳에 스며들게 하는 일이란 곧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세상 각 분야에 실현하는 일이라 정리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삼중직무(사제직, 왕직, 예언자직) 가운데 예언자직은 미래의 운명을 점치는 일이 아니라, 구약의 전통을 이어받아 세상 질서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지,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는지를 식별하여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다.

 

사제들의 고발을 세상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일로 해석하는 의견은 앞의 ‘나주 율리아’에 관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신앙을 세상일과 별개의 것으로 그것도 영적인 것으로만 제한하여 이해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세상 속에 육화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영적세계에, 세상 밖에 가두어놓은 셈이다.

 

교회와 세상, 하느님 나라와 세상, 교회의 가르침과 세상의 질서, 그리고 신앙과 생활은 소통할 수 없는 별개의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이 그런 것인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면서 1992년 우리 가톨릭교회가 내놓은 “가톨릭교회 교리서”내용을 개관하는 이 연재를 통해 경향 독자들의 얼굴(신앙 곧 삶)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닮아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다.

 

[경향잡지, 2008년 1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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