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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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5: 신유박해 순교자(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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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4 ㅣ No.109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상반기 공개대학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5) 신유박해 순교자(충청도) - 황일광 등 5위


여사울이야말로 충청도 내포교회의 중심지다. 오늘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다.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권철신(암브로시오)ㆍ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한 복음의 시발점이 바로 여사울이기 때문이다.

여사울에서 비롯된 복음은 내포평야로 퍼져나갔고, 여사울은 내포교회, 넓게는 충청도 교회의 못자리가 됐다. 이어 홍주(홍성)로, 보령으로, 당진으로, 면천으로, 덕산으로, 청양으로 복음이 전해졌다.

18세기 말 충청도 5개 목(牧), 공주목과 충주목, 홍주목, 천안목, 청주목 가운데 홍주목의 복음화가 가장 활발했다. 그래서 정3품 당상관인 목사가 다스리던 홍주목 관아에는 충청도 남부 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압송돼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된다.

충청도 북부 지역에선 충주목의 전교가 가장 활발했는데, 이는 충주에서 뱃길로 한양 못 미쳐 양근 등 근기(近畿)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종 125위 중 1801년 신유박해로 피를 흘린 충청도 지역 순교자는 5위다. 음성 출신 이국승(바오로, 1772~1801)을 비롯해 여사울과 홍주 출신으로 친척 사이인 김광옥(안드레아, 1741~1801)ㆍ김정득(베드로, ?~1801), 덕산 출신 김사집(프란치스코, 1744~1802), 홍주 출신 황일광(시몬, 1757~1802)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은 역시 황일광이다. 백정 출신으로 1793년 홍산으로 이주하면서 복음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존창을 찾아가 입교한 그는 두 개의 천국에 대한 고백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에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다면서 하나는 자기 신분에 너무도 과분한 대우를 해주는 '지상 천국'이고, 또 하나는 '후세 천국'이라고 고백하곤 했던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인 뒤 늘 기쁨 속에서 살던 그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일시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1800년 2월 경기도 광주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이웃으로 이주한 그는 정약종이 서울로 주거를 옮기자 그를 따라 삶의 터전을 옮겼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중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땔나무를 사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돼 옥에 갇혔고, 이듬해 1월 고향인 홍주로 이송돼 참수형을 받는다.

이국승은 신앙생활을 하고자 '동정'을 선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충주에 전해진 복음을 접한 그는 양근에 살던 권일신을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다. 1795년 을묘박해 때 충주에서 체포됐으나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일시 배교한다. 그러나 곧 신앙을 되찾은 그는 처와 자식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혼인을 하지 않고 서울로 이주해 훈장생활을 하며 신앙을 전파한다. 최창현(요한)ㆍ정약종 등과 함께 교리를 익혔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체포돼 그해 5월 공주로 끌려가 황새바위 형장에서 순교했다.

김광옥ㆍ정득은 먼 친척 사이로 의좋은 교우들이었다. 예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면장을 지낸 김광옥은 그의 나이 50세 무렵에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아침 저녁으로 기도문을 암송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홍주 대흥고을 출신인 김정득은 친척인 김광옥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달리 신앙생활에 대한 기록은 별반 남아 있지 않다. 두 사람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길동의 전설이 남아 있는 공주 무성산에 은거했으나 곧 체포돼 예산으로 압송됐다가 다시 청주로 이송된다. 그리고 청주에서 각각의 출신지인 예산과 대흥으로 옮겨져 순교한다. 청주를 출발해 각자 고향마을로 돌아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작별을 고하며 다음날 정오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지던 모습이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남아 있다.

김사집은 신심서적 필사자로 알려져 있다. 과거공부를 하던 중 신앙을 접한 그는 이후 오로지 천주교에 대한 공부에만 몰두했고,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서적을 필사해 나눠주는 데 힘을 다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많은 천주교 서적들이 압수됐는데, 그 대부분이 김사집이 필사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신자들을 가장해 복음서 1부를 베껴줄 것을 간청하던 이교도 두 사람에 의해 고발돼 체포됐고, 1802년 1월 청주 장터에서 곤장 80대를 맞고 순교했다.

"순교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원 중 하나였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며 순교의 길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걸어갔던 순교자의 모습은 충청도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평화신문, 2013년 5월 5일, 백병근 연구원(미카엘,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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