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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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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복자 124위 열전57: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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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7 ㅣ No.1475

[복자 124위 열전] (57)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주님 대전에 오른 '제주의 사도'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누구나 인생엔 전기(轉機)가 있기 마련이다.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1816∼1867) 복자에게 삶의 전기는 ‘풍랑’이다. 풍랑이 그를 홍콩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뒤흔든 신앙을 만나고 받아들인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정화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복자의 출신지는 제주다. 지금의 제주시 조천읍 일주동로 일대다. 장사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1857년 2월 중순 동료들과 함께 무역차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됐다. 37일간이나 해상을 떠돌던 그는 중국 광둥 해역에서 영국 선박에 구조됐다. 동료들은 이미 탈진해 죽은 상황이었다.

영국 배에 올라 기갈을 해결한 그는 홍콩에 도착한 뒤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홍콩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난 것이다. 당시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몸이 아파 홍콩에서 휴양 중이던 이 바울리노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그해 5월 31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부대표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이어 귀국한 그는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나기도 한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고향 제주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이웃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했으며, 이듬해인 1858년 봄에는 육지로 나와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기도 한다.

이후에도 그는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865년에는 두 번째로 난파,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프티장 신부를 만나고 이듬해에 귀국했다.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육지로 나와 리델 신부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함께 갔던 사공 2명을 영세시키기도 했다.

당시 그가 불렀던 천주가사가 오늘까지도 전해온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병인 치명 사적」 제3권, 강 마리아의 증언)

제주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그의 활동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된다. 박해가 일어났음에도 김기량은 여느 때처럼 장사하러 통영으로 나갔다가 게섬, 지금의 통영시 산양읍 풍화일주로에서 체포된다. 그의 배에서 성물이 발견된 것이 원인이었다.

삼도수군통제영 관아로 끌려간 그는 중영, 곧 통제사의 부장이자 참모장 격인 우후 영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다 받아야 했다. 이에 굴복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킨 그는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했으니 그대들도 마음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하며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통영 관장이 대구 경상감영에 “김기량과 동료들을 배교시킬 수 없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리자 감사는 “그들을 때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그와 동료들은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해야 했고 그럼에도 목숨을 유지하자 관장은 이들 모두를 옥에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한다. 이날이 1867년 1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관장은 이들을 교수형에 처한 뒤 특별히 김기량의 가슴에만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김기량이 순교한 뒤 제주에는 신앙의 맥이 끊긴다. 40년 뒤 다시 선교가 시작됐을 때, 예비신자 교리를 받던 이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기량 사후 흩어진 신앙의 씨앗은 40년의 세월을 기다려서야 발아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난 사도적 결실은 이제 제주교구 공동체를 통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26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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