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2015-0201.....연중4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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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2-01 ㅣ No.1689

연중 제4주일 (나해)

신명기 18,15-20     1코린토 7,32-35     마르코 1,21-28

2015. 2. 1.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

올해도 한 달을 서둘러 보내고, 벌써 새로운 달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똑같은 시간을 지내고 나서 과거를 돌이키는 것은 사람만이 하는 유일한 행동입니다. 기록을 남기지 않아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다른 동물들도 비슷한 행동을 할까요? 생명체가 움직이면서 그 움직임이 다음순간에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는 없을 일입니다.

 

세상에서 살 시간이 많다고 할 사람에게, 삶의 끝을 준비하는 일에 대한 얘기를 하면 뺨을 맞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처럼, 사람이 거부하면 삶에 찾아오지 않을 일도 있지만, 많은 경우 사람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실현돼도 좋은지, 실현되면 나쁜지 사람에게 그 판단을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극적인 일들은 내 앞에 예고도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을 미리 준비한 사람이 아니라면, 큰 문제를 만났을 때, 그의 삶이 심각한 혼란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말로 먼저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로 표현하는 진실한 것이라고 누가 판단하겠습니까? 이것을 제대로 구별할 줄 안다면, 그 사람이 올바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해줄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말로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좋은 뜻을 갖고 그것을 드러내려고 해도, 세상은 그렇게 좋은 마음을 가진 내가 내 뜻대로 일이 되도록 그냥 놓아두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표현입니다. 이게 글자그대로 힘이 있고 그에 대해서 할 말이 있으려면, 원칙대로 살아야 하는 일이겠지만, 내 삶의 태도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전제를 두고, 사악한 일이 내 삶에 들어오지 않게 할 방법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과 부딪힌 이야기를 전합니다. ‘더러운 영을 가졌다는 사람이 예수님께 덤빈 것이라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도전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뛰어난 것은 알겠는데, 왜 내 삶에 간섭하십니까? 나를 그냥 내 맘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십시오(!)’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발버둥치고 항의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이 사람과 세상을 보는 자세와 예수님의 시선이 달라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신앙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예수님과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의 한판 승부에서, 당연히 예수님이 이겨야(!)하겠지만 그 과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세를 보는 것도 흥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 일은 새롭고 권위가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하는 소리로, 사람들이 놀랐다고 마르코복음사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전합니다. 이런 것처럼, 세상에 놀라운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놀라운 일을 보고서 놀랍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같은 것을 신앙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놀라운 것을 보고서 놀랍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는 얘기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놀랍다고 말해야 하고, 놀랍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세상에 실현되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느끼거나 체험하고 나서, 그저 입으로 놀랍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우리가 가진 눈으로 하느님의 업적을 보고, 우리가 가진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우리가 신명기에서 모세가 하는 말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저희가 주 저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시고 이 큰불도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죽지 않게 해주십시오.’ 히브리백성이 하느님께 자기들의 상황을 말하는 배경을 상상하면, 그들은 아주 배부른 사람들이었든지, 아니면 하느님의 현현이나 말씀을 진정한 자세로 대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하다면, 우리는 그들의 본보기에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하느님의 현현과 말씀을 우리가 소홀히 해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하느님을 생각한다면서, 소홀히 해도 좋은 정도나 분량 묻는 것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지만, 사람은 하느님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흔히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게 얼마나 큰 잘못을 만들어낼지는 모르거나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오늘은 2월의 첫째 날입니다. 1년에서 한 달을 보내고 새로운 마디의 시간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가 늘 새로워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합니다만, 그래도 새로워질 필요는 있습니다. 사람과 하느님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어느 대상을 더 먼저 볼 것이며, 어느 대상의 뜻에 내 삶을 맞추느냐 하는 차이뿐입니다. 코린토서간을 통해서 들은 말씀처럼, 내 삶의 자세는 누구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지 잠시 돌이켜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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