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2015-0125.....연중03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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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1-24 ㅣ No.1684

 

연중 3 주일(나해)

요나 3,1-5.10       코린토17,29-31      마르코 1,14-20

2015. 1. 25.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은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하고...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듣는 소리는 매우 많습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소리들 가운데, 그 소리에 따라서 내가 어떤 행동할 할 것인지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내가 알아듣고 행동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 수도 있고, 내가 행동을 하기는 했는데 맘에 들지 않는 결과를 만들거나 그 결과가 다른 사람의 원성(怨聲)을 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내 삶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소리만 듣고 싶고, 그런 결과만 만들고 싶다고 하겠지만 그것도 사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소리에 응답하는 결과이겠습니까? 혹시 제가 하는 질문에, 여러분이 개인적으로라도 내가 누구 소리를 듣고 이곳에 왔다는 거야? 그냥 와야 하니까 온 것이고, 오지 않으면 내가 치러야 할 부담스러운 일이 생기니까 오는 거지....’하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저는 그분을 향하여 왜 와야 한다고 생각했느냐?’고 다시 묻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몹시 안타까운 자세로 세상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삶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어서 자존심을 드러낸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흔히 자존심을 드러내서 행동하면, 자기 삶에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좋은 일만 생기게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런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오늘은 연중시기3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과 독서에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소리그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읽고 들었습니다. 복음에서는 네 명의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반응을 보이는 행동을 했고, 첫째독서에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알리는 요나예언자의 말에 따라서 니네베에 살던 사람들이 응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둘째독서에서는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지, 그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공(專攻)물고기를 잡는 일이었던 두 명의 어부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부들의 친구, 두 명의 어부도 또 부릅니다. 그들이 실제로 사람을 낚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따랐는지 우리가 구별할 능력은 없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뭔가 특별한 진정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전하는 내용을 글자로 대하는 우리는 그들이 드러냈을 놀라운 감정을 읽을 방법이 없습니다만, 그런 일이 우리에게도 다가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가정을 담은 질문이니까, 가정을 담은 대답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지금 당장 그 결과를 가져오라고 외치는 분도 아니고, 사람이 자기행동을 통해서 참된 결과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예언서를 통해서 들은 얘기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독서에 나오는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순하게 순명한 듯 보이지만, 오늘 독서내용보다 앞선 1장과 2장을 읽으면, 요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오늘 들은 내용에 앞서서, 커다란 물고기뱃속에 들어갔던 일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에도 그가 진짜로, 참되게 변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직접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시지도 않고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탈출기와 신명기를 읽으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을 위해서 선택하신 방법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사람은 그 과정을 생략하고 직접 하느님을 맞대면 해야겠다고, 맞대면 할 수 있다고 우깁니다. 그게 얼마나 가능한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의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지만,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마음자세를 얼마나 바꾸고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요나는 제대로 믿지 않았지만, 잔뜩 불만을 품고 니네베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러 갑니다. 그렇게 하룻길을 걸은 다음, 도심 어느 쪽에선가 짧게 선포한 그의 말에 따라 사람들이 태도를 바꾸자, 하느님은 요나를 통해서 선포했던 당신의 계획을 바꾸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달리 행동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드는 행동일까요?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하느님이 필요하고, 나에게는 그렇게 너그러운 하느님이 필요하다고 욕심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내 허락을 먼저 얻은 다음에 생기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가능하겠습니까?

 

바오로사도는 세상의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욕심에 연연해하지 말고, 초월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 자세에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일 사람으로 사는지, 아니면 내가 꾸민 내 세상에서만 나 혼자 살겠다고 우기다가 결과는 없는 삶으로 끝낼 것인지 선택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지, 또 듣는 소리를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것인지에 따라 각자가 드러내는 삶의 모양이 다를 것입니다. 아무것도 우리의 삶을 강요할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올바른 길을 따라 사는지 살펴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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