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2014-1228.....성가정축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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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12-27 ㅣ No.1667

성가정(聖家庭)축일 (나해)

집회 3,2-6.12-14         콜로새서 3,12-21       루카 2,22-40

2014. 12. 28. (주일) 이태원

주제 : 가정의 올바른 모습을 배우기

세상 모든 사람들의 출발점은 가정입니다. 보통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배우고 익힌 사랑과 서로 격려하고 힘을 얻은 분량에 따라 삶의 모양이 달라집니다만, 사람이 인생의 1/3이나 1/4정도를 그곳에서 지내고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게 하는 가정은 참으로 커다란 못자리이기도 합니다.

 

못자리에서 자랄 만큼 자란 (=옮겨심기 위하여 가꾸어 기른 어린 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또 더 많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 다른 장소로 옮겨지고 거기에서 자신이 받은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맺게 된 결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에게 특별한 대가도 없이 돌려줍니다.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굳이 이 자리에서 가정에 대하여 강조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들 각자는 어린 시절을 보낸 가정과 그 안에서 내가 자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지금 인생에서 내가 맺고 있는 모습이나 여러 가지 결실은 인생의 첫 부분이었던 내 인생의 1/3이나 1/4 정도 시간을 지낸 가정에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가정축일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된 장소,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으로 이루어졌던 나자렛동네의 가정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평화로운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윗임금과 솔로몬임금 때로부터 400년쯤 시간이 흐른 다음 바빌론제국에게 조상들의 나라가 멸망했고, 그 뒤 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나라 저 나라의 속국(屬國)으로 살면서 그들의 상황은 자기들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자꾸만 갱신(更新)하던 때였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았던 곳, 그 옛날의 유대국가가 있던 곳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100년 전쯤에는 이미 로마제국에 병합된 상태였고, 그 나라의 식민통치에 영향을 받던 장소였습니다. 그때,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자기가 다스리던 제국에 인구조사를 명령했고, 그 와중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오늘복음은 우여곡절의 시간을 견뎌낸 상황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고 40일이 지난 다음, 그 어머니 마리아가 이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선언하던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가정은 경제적으로 풍요한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율법에 따라 정결예식의 제물로 양 한 마리나 염소 한 마리를 바친 것이 아니라, 비둘기 한 쌍을 바쳤다는 것이 그런 경제적 상황을 암시합니다.

사람이 가진 돈이 많으면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움직일 때에 어깨를 펴고 설 수 있는 가능성은 클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뛰어난 일을 했다거나 의미 있는 일을 남겼다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진 돈이 많았다는 소리를 듣기가 어려운 것을 보면, 돈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의 움직임에는 가난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가난한 상황에 있던 사람들을 상대로 먼저 움직이셨다는 소리도 같은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교회공동체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세상 삶에서 돈이 없다는 사람과 똑같은 소리로 쉽게 단정합니다. 그 두 가지 표현이 글자로 쓸 때는 가난이라는 똑같은 표현을 쓰지만, 뜻까지 똑같은 것은 아닌데, 우리는 아주 쉽게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잘못 알아듣게 되면 생기는 치명적인 결과가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천주교회공동체는 부자를 적()으로 여긴다는 이상한 소리와 교회공동체에는 부자인 사람이 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그 역시 이상한 소리와 돈을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는 희한한 곳으로 교회공동체를 생각하게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잘못 알아듣고 잘못 생각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성가정축일에 돈과 관련된 얘기를 생각했습니다만, 세상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는 재물의 하나인 이나 ‘money’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손에서 예수님을 건네받아 봉헌기도를 바친 예언자 시메온이나 그 놀라운 현장에 있었다고 루카복음사가가 전하는 한나라는 여자예언자도 모두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예언자에게 적용하는 가난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루카복음에 나오는 표현을 적용하여 설명하면,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고 하느님을 섬긴 사람이라는 표현이 교회공동체에서 말하는 가난의 진정한 의미라고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를 바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돈은 없고 가난한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입장이 항상 진리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가난한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에 어떤 협조를 하고 있으며, 바로 그 일을 어떻게 몸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또 자녀로서 드러내야 할 합당한 모습을 얼마나 잘 기억하고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살펴야 할 한 해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합당한 모습이란, 동정과 온유한 마음을 갖고서 효도나 순종을 제대로 드러내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저희가 간절히 청하오니, 당신 앞에 드러내는 저희 생각과 삶의 자세가 언제나 당신께 드리는 효도의 삶이 되게 이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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