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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문화 비평: TV 예능 21세기 대중사회의 가상 복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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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601

[문화 비평] TV 예능 21세기 대중사회의 가상 복음서


TV를 켠다. 실존인물이 매주 일정 한 시간에 등장해 실제상황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 개중에는 우리가 먹고사느라 바빠 잊어버리고 살았던 이웃의 일상 이야기도 있다.

그들은 자기 약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소탈한 태도와 쉬운 말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들은 우리가 가지 못한 곳을 대신 찾아가고,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한다. 그들이 경험하는 넓은 세상과 사건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를 매료시킨다.

우리를 웃기는 게 임무인 사람들이 가끔, 아니 요새는 꽤 자주 우리를 울린다. 비인기 스포츠에 도전한 아저씨들이 약한 체력과 잦은 부상과 고된 훈련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꼴찌가 된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차별받던 보통사람이 Mnet ‘슈퍼스타 K’에 도전해 치열한 노력과 노련한 스승의 담금질을 거쳐 눈부신 스타로 거듭난다. 대중의 뇌리에서 잊힌 채 힘든 나날을 보내던 가수가 MBC ‘나는 가수다’ 무대로 돌아와 절절한 열창으로 관객을 울린다. MBC ‘무한도전’의 유재석을 선망하는 MC 지망생이 그를 만나 가르침을 얻고자 자신이 사는 울산에서 방송국이 있는 경기도 일산까지 걸어가는 고행을 감수한다.

‘바보상자’의 원흉으로 지목되던 TV 프로그램이 소외된 이에게 친교를, 슬퍼하는 이에게 위로를, 차별받는 이에게 평등한 기회를, 메마른 마음에 눈물을 선사한다. 갖은 난관을 헤치며 성장하는 실존인물의 이야기는 화면 밖의 대중에게도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성과 자존감을 선사한다. 어쩌면 ‘구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값진 인생의 순간을 실제 상황 안에서 만들어내는 TV 장르의 이름은, ‘예능’이다.


웃음에서 감동으로

‘예능’의 사전적 정의는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등 예술과 관련한 능력의 통칭’이라고 한다. 오늘날 ‘예능’이라 부르는 TV 장르의 명칭은 1990년대 중반까지 ‘오락’이었고, 프로그램 형식도 코미디, 음악쇼, 토크쇼 등으로 제한적이었다.

1995년 케이블 TV의 출범으로 오락 채널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프로그램 간 차별화가 요구되면서, TV 오락은 현장체험, 문화탐방, 과제수행, 게임, 상황극 등 다양한 소재와 형식을 도입하며 ‘예능’이라는 광의의 명칭을 얻었다.

넓어진 것은 장르의 개념만이 아니다. 연출가들이 스튜디오 밖으로 나아가 세상 속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일상과 사회생활을 다루면서 예능은 사회의 축소판이 되기 시작했다. 드라마와 달리 한번 자리를 잡으면 5, 6년씩 장기 방영되는 연속성, 출연자의 실제 경험과 프로그램의 역사를 발판 삼아 시청자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진정성은 예능을 TV의 최강자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한 출연자들의 경험담이 한계와 좌절, 인내와 동지애, 고통 극복과 초월 등 삶의 다양한 국면을 보여주면서, 예능이 시청자에게 선사하는 정서적 쾌감의 영역도 감동, 연민, 동질감, 응원심리, 눈물, 카타르시스 등으로 넓어졌다.

그 결과로 예능은 인간의 희망과 좌절과 구원을 함축한 ‘가상의 복음서’로 대중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출연자의 고백을 요구하는 토크쇼와 특정 과제수행을 목표로 한 리얼리티쇼에서 더 뚜렷이 드러난다. 상황극을 통해 현대인의 울분을 대리 표출하는 코미디의 효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 글에서는 실제상황을 전제한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겠다.


고해, 치유, 성장의 드라마

KBS2 ‘여유만만’, SBS ‘강심장’, MBC ‘무릎팍 도사’를 위시한 고백 토크쇼들은 일정한 서사구조를 공유한다. 출연자가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과거사를 털어놓으면 진행자와 동료들은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으로 그의 앞날을 축복한다. 줄거리만 추려놓고 보면 고해성사의 형식을 본떴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채널 선택권을 손에 쥔 시청자가 신이라면 눈물의 주인공은 고해자다. 스튜디오가 고해소라면 진행자는 사제다. 고해소의 청지기인 연출자는 화면을 가득 채운 출연자의 붉어진 눈시울과 구슬픈 배경음악으로 시청자의 자비를 청한다. 주인공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연민 어린 시선과 진행자의 격려는 사죄경에 비길 수 있겠다. 참회하는 곳에 자비가 내리는 고백 토크쇼의 공식은, 겉보기만을 단순 비교하자면, 죄인과 약자를 단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치유 기적과도 닮았다.

과제수행형 리얼리티쇼는 인간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구체적인 상황과 긴 호흡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세대에게 오랫동안 인기를 얻고 있는 KBS2 ‘해피 선데이’가 그렇다. 여행 프로그램의 대명사 ‘1박 2일’에서 우리나라 곳곳의 진풍경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는 인간관계다. 출연자들의 상호관계, 출연자와 여행지 주민들과 시청자들이 이루는 친교가 ‘1박 2일’의 재미를 배가한다.

계약관계로 만난 출연자들이 만 4년의 야생 체험을 거쳐 친형제 이상의 우애를 자랑하는 의형제로 거듭난다. 외진 시골마을에서 적적하게 지내던 노인들에게 젊은 이들의 깜짝 방문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기쁨이 된다. 여행지 주민들의 환대와 시청자들의 지지로 ‘국민 예능’의 영광을 얻은 출연자들은 ‘시청자 투어’를 열어 국민의 사랑에 보답한다.

‘남자의 자격’의 장기 프로젝트는 성장 서사를 더 자주 활용한다. 얼마 전 종영한 ‘청춘 합창단’을 돌이켜보자. 지난해 첫 합창 프로젝트를 통해 화합의 아름다움을 배운 남자들이 동안 신드롬과 맹목적인 청춘 예찬에 차별받던 중 · 노년층으로 눈을 돌린다. 어려운 여정을 예상하면서도 세대화합이라는 다소 시혜적인 명분을 내세웠던 출연자들은 오디션 현장을 찾아온 인생 선배들의 눈물겨운 사연 앞에 할 말을 잃는다.

인생의 황혼에서 다시 희망을 찾는 실버 합창단의 지휘자는 그 자신도 갖은 좌절과 방황을 겪었던 음악인 김태원이다. 우여곡절 끝에 화음을 맞추고 합창대회 예선을 통과한 합창단이 그다음에 한 일은 서울 소년원 위문공연이었다. 그것은 약자가 약자를 위로하는 사랑의 만남이요, 세상의 음지를 향한 기쁜 소식이었다.


예능에 비친 세상과 사람

그러나 TV를 끄는 순간, ‘기쁜 소식’은 사라지고 만다. 출연자의 속마음이 방송에 임할 때만큼은 진심이라 해도 시청자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경험이 아닌 감상의 대상일 뿐이다. 리얼리티쇼에 단골로 등장하는 고통 극복 체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들으며 고통의 가치를 관념적으로 배울 수는 있지만, 세련된 편집으로 미화된 고통은 인간의 감정을 시청률의 미끼로 상품화할 수도 있다.

철저히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방송의 법칙은 예능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을 훼손한다. 시골 어르신들에게 친손녀처럼 살갑게 대하며 울먹이던 KBS2 ‘청춘불패’의 몇몇 소녀들은 바쁜 연예활동을 이유로 제작팀에서 빠져나갔다.

또한 신문사의 종합편성 채널(종편) 출범이 가시화되면서, 출연자들의 결속력과 시청자 충성도가 높은 ‘무한도전’과 ‘1박 2일’은 높은 출연료를 내세운 종편들의 영입 경쟁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렇더라도, 대중의 마음을 얻고자 열성을 다하는 예능의 몸부림은 교회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시청률과 광고수익이라는 세속적 동기 때문이긴 하지만, 적어도 예능은 현대인의 관심사와 정신적(때로는 영적) 갈망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반영한다.

실존인물의 삶을 압축한 네모난 상자 안에는 진실한 벗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자아 성장과 행복에 대한 열망이 있고, 나의 탈렌트로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픈 선의도 있다. 동시에 그 안에는 유명인의 성공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들이 겪었을 시행 착오를 나만큼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움도 있고, 남들의 선행을 응원하고 정의 실현을 염원하면서도 나는 동참하기를 주저하는 비겁함도 있다.

선을 그리워하면서도 약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현실이지만, 교회는 바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들이 바라는 ‘기쁜 소식’은 무엇이며 교회가 줄 수 있는 ‘참 기쁨’은 무엇인가. ‘참 복음서’의 라이벌인 ‘가상의 복음서’, TV 예능은 어떻게 대중을 매료시키는가. 그들의 전략에서 교회가 취할 것은 무엇이고 버릴 것은 무엇인가. 얼핏 보면 유치하고 무의미한 감정놀음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눈 밝은 복음 선포자들에게 TV 예능은 오늘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참고서가 될 수도 있다.

* 김은영 크리스티나 - 「경향잡지」 기자로 일하며 신앙의 관점으로 대중문화를 읽는 일에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 주교회의 언론홍보 업무를 맡고 있으며, TV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력과 사회적 의미를 분석한 결과물을 모아 「예능은 힘이 세다」(2011)라는 책을 냈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김은영 크리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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