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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e-세상에서 영성을 살기: 소셜미디어, 연결이 단절을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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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17 ㅣ No.458

[e-세상에서 영성을 살기] 소셜미디어, 연결이 단절을 부르다


군중 속의 개인은 책임을 지지 않아요!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을 두고 서로 다른 시각으로 수군거립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오.” “아니오. 그는 군중을 속이고 있소”(요한 7,12).

그러다가 세상을 대변하듯 한목소리로 외치기도 합니다.

“없애버리시오. 없애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요한 19,15).

과연 군중은 누구일까요? 나는 또는 당신은 집단의 무리에서 어떤 목소리를 낼까요?

집단 속에 있으면 몇몇 사람들의 ‘동조’가 서로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하지요. 그러나 군중 속에 숨어있는 개인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합니다. 군중 속의 개인은 익명의 ‘누구’일 뿐이니까요. 오늘날의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군중심리를 더욱 부추기게 합니다. 유사한 의견이나 관심사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내 집단’을 만들게 되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려 하지요. 이런 네트워크의 군중성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지한다는 착각에 누군가를 비난하는 데도 당당합니다.


인간에게 ‘소셜’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요즘 10대들 사이에 ‘카따(카카오스토리 왕따)’라는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한 아이를 단체방에 초대하여 집단으로 그 아이를 욕하거나 싫어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하는 본인은 이 초대에 응하지 않아도 불안하다는 것이지요. SNS 폭력은 24시간 도망갈 수 없으니까요. 어디론가 숨을 수 있는 육체적인 폭력이나 금품갈취보다 더 무섭고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방송에서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한 아이를 집중적으로 욕을 하며 따돌림시키는 아이들에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욕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왕따니까. 그냥 왕따니까.” 그러곤 “죄책감이 들지 않느냐?”고 묻자 “아니요.”라며 태연하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집단 따돌림이 10대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악성댓글로 인한 왕따현상은 연령과 계층을 넘어선 사회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따돌림이나 거절을 당할 경우 심리적 고통뿐 아니라 신체적 통증까지도 유발한다고 합니다. 이 통증은 마치도 화상을 입었을 때의 고통과 흡사하다고 하지요. 사이버 게임에서 따돌림을 당해도 뇌는 실제로 왕따 당할 때와 똑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하니 그만큼 우리 인간은 ‘소셜’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존재인가 봅니다.


‘끼리끼리’에 집착할수록 더 외로워요!

인간은 ‘소셜’해야 하기에 ‘연결’에 대한 욕구가 무엇보다 강렬하여 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집단에서의 이탈은 그 어떤 고통보다도 아픕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셜미디어는 인간의 소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지요. 소셜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해서일까요? SNS 안에서 ‘개인’의 가치와 신념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끼리끼리’어울리다 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진짜 그들 취향의 일부가 된 듯 착각하게 되니까요. 그러면서 끊임없이 서로 비교하고 그들과 같아지려고 하거나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스스로 소외되기도 합니다.

‘SNS가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어느 방송에서, 지방에서 올라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한 젊은이를 취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친구들이 외국으로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며 올려놓은 사진을 카카오스토리에서 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력한지를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공부도 하기 싫고 힘 빠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끊으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이 젊은이는 그나마 소통하지 않으면 친구 소식도 모르고 더 소외될 것 같아 끊을 수도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SNS 세상에서는 단 한 순간의 이벤트가 언제나 잘나가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지요. 그래서 ‘소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집착하게 만듭니다. 진정성보다는 과시, 관심보다는 관계, 사실보다는 느낌에 빠지게 하는 SNS 공간에서는 진심으로 나를 바라볼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니까요. ‘홀로’서 용기를 내어 대면하지 않아도 과시하며 ‘나’를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소셜’한 사람은 행복 네트워크를 구축해요!

우리는 실제로 수백 명의 친구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를 만나 웃고 떠들고 함께 식사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SNS에서 만난 친구라 할지라도 결코 그 어떤 우정을 만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집단으로 무리지어 만난다면 쉽게 잊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친구는 나 홀로 그와 마주하면 편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러려면 ‘홀로’ 마주하는 연습을 해야겠지요. 조금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이제 그만 군중 속에서 나와 당당하게 눈빛과 몸짓을 주고받는 만남에서 시작해야겠습니다.

실체 없는 ‘군중’ 속에 숨어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만큼 현실에서의 만남은 줄어들겠지요. 그러다가 진짜 힘들고 외로울 때 소리를 지르고 손을 내밀면 누가 와서 잡아줄까요? ‘좋아요’, ‘힘내요’라는 수백 개의 단어만으로 위로받기에 충분할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를 ‘연결’해 주는 소셜미디어가 행복한 네트워크를 공유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군중 속에 숨어 책임질 수 없는 언어로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혀를 조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입술을 조심”(1베드 3,10)해야겠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니콜라스 크리스태키스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부분 행복한 사람 옆에는 행복한 사람이, 그리고 불행한 사람 옆에는 불행한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내가 행복하다면 분명 나의 이웃도 행복할 겁니다. 서로를 챙기고 배려하는 행복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간다면 우리는 진실로 ‘소셜’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소셜네트워크’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하느님의 축복이며 선물이니까요.


<더 공부하고 싶으세요?>

점점 자기중심적인 문화가 되어가는 이 시대에 타인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으로 소중하다.

「SNS시대의 카네기 인간관계론」의 저자 데일 카네기는 성공적 인간관계는 어떤 매체가 측정기준이 아니라 ‘의미’라고 말한다. ‘의미’가 모든 매체의 효율성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댓글이 많이 달리고 우호적 반응을 얻어낸다고 하여 결코 이들이 모두 친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관계와 관심, 호감과 공감은 다르기 때문이다. 관계나 호감은 만나지 않아도 가능하다. 하지만 진심이 있는 관심과 공감은 서로 다가가고 상대의 입장에 서서 배려하고 도와주는 ‘우정’이며 반드시 만나야 되는 것이다. 눈을 마주보고 차를 함께 마시며 눈짓과 몸짓으로 대화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다.

* 김용은 제오르지아 - 살레시오수녀회 수녀. 부산 살레시오영성의집 관장으로 청년과 평신도 신심단체를 위한 현대영성 강좌 및 피정지도를 하고 있으며 여러 수도단체에 디지털 시대의 봉헌생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미디어생태학을 전공하고 버클리신학대학원 내 살레시오영성센터(ISS)에서 살레시오영성을 수학했다. 「세상을 감싸는 따뜻한 울림」, 「3S 행복 트라이앵글」, 「영성이 여성에게 말하다」 등의 책을 냈다.

[경향잡지, 2013년 5월호, 김용은 제오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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