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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기도생활, 잘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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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4 ㅣ No.451

[세상 속 신앙 읽기] 기도생활, 잘 되십니까?


종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신앙을 선택하는 동기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를 꼽듯이 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일까? 아니면 당장 사는 데 필요한 현세적 축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마음의 평화나 현세적 축복은 도대체 어떻게 얻는 것일까?


마음의 평화인가, 현세적 축복인가?

성당이든 사찰이든 사람들은 일상의 속됨을 벗어나 조금은 고요하고 성스러우면서도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고요한 성당이나 거룩한 미사 전례에서 느끼는 성스러움, 산사에서 느끼는 고요함이나 스님들의 수행하는 모습 속에서 보이는 성스러움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내적 평화를 느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적지 않은 이들이 무속인에게서 현실의 액운을 쫓고 복을 가져올 수 있는 비법을 찾거나, 한국의 일부 개신교가 강조하듯 믿음이 현세적 건강과 재물, 자녀의 축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이 종교적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분명히 한국인들은 세상에서 맺힌 한을 풀고 복을 나누자는 민간신앙의 큰 틀에서 종교적 삶의 이유를 찾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그런 종교적 위안이나 현세적 축복의 약속은 일종의 심리적 위안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마음을 쉬게 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풀고,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기다리도록 심리적 안정을취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종교 밖에도 많다.

요즘 뜨고 있는 마인드컨트롤과 관련된 심신수련 방법이나, 심리상담 등을 통해 얼마든지 심리적 위안과 휴식을 얻을 수 있다. 요즘 서점가를 덮고 있는 자기계발서도 대부분 인간의 심리와 자기의지에 집중하는 사고방식의 전환을 통해 내적 치유나 안정을 유도하고, 현실의 성공비결을 가르쳐준다.

최근 신흥영성운동가들이 퍼뜨리고 있는 마음수련원이나 명상 센터, 요가, 단월드, 국선도 등은 인간의 심리적 안정의 욕구를 이용하여 정신세계에서 어떠한 의무나 책임에 매이지 않고 홀로 영적 만족으로 이끄는 기술을 가르치기도 한다. 한국 개신교는 무조건적인 믿음과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십일조)이야말로 현세적 축복의 조건이라고 가르치기까지 한다.


종교적 삶의 중심, 기도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나 심리적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되고자 종교적 삶을 도구로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종교는 단순히 그러한 현실적 욕구를 채우려는 방편이 아니다. 종교는 본래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 자신의 삶의 근원과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함과 나약함, 죄와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고 수용하며 보이지 않는 믿음의 영역을 향하도록 초대하는 것이 종교의 진정한 역할이다. 종교는 유한한 세상 속에서 무한하고 영원한 세상을 희망하게 하고, 속되고 악으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 거룩하고 선한 의지로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삶의 태도를 가능하게해주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모든 종교적 인간 (homo religiosus)이 가진 ‘초월에로의 희망’을 현실 속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이다. 기도하는 인간은 자신이 죽음과 고통, 죄와 악으로 표현되는 유한함을 고백하는 이들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세상을 넘어 거룩하고 영원한 초월적 영역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는 인간이 신 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거룩함과 영원함을 만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기도생활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자아중심에서 벗어나 참된 자아를 만나고, 영적 쉼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사람에게만 기도가 의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성과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느끼는 분주함이나 자신의 세속적 욕망에만 매여있는 이들에게 기도는 가치 없는 일일뿐이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할 시간이 없다. 기도할 줄 모른다.”라고 손사래를 치는 것은 기도가 하나의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에게 가장 큰 기도는 미사 전례이다. 미사는 시작부터 끝까지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그 기도 안에는 양심성찰과 하느님 찬미, 말씀을 듣고, 찬송하며, 자신의 마음을 봉헌하고, 침묵하며, 그리스도의 현존을 표징으로 받아 모시는 신비에 이르는 기도 종합선물 세트와 같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세상 속의 죄에 물든 나를 제대로 보고,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나의 삶의 주인인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과의 영적 교감과 힘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를 하나의 전례적 형식이나 의무로 받아들일 때 미사가 지닌 기도의 참맛을 잃는다. 생각 없이 미사 기도문을 외우고, 의미 없이 가슴을 치거나 십자가를 그으며, 정성 없이 봉헌하거나 진지함 없이 성체를 모시는 습관적인 행동이 신자들에게 미사의 은혜를 잃게 한다.


시간의 ‘십일조’를 바칠 줄 알아야

열심한 신자들도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묵상기도나 성체조배의 체험이 없거나, 수없이 반복하는 묵주기도나 기도문을 생각 없이 읽어제치는 물량적 기도에만 열중한다면 정작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과의 만남이라는 참된 종교적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

기도하려면 먼저 쉴 줄 알아야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눈과 귀로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욕망의 허상들을 끊고 사색하며, 하느님께 자신의 시간을 봉헌할 줄 아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형식이거나 의무이기 이전에 가슴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다는 시간의 ‘십일조’를 바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분주함 속에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좌절과 후회로 짜증을 부리는 사람에게 기도는 사치스러운 일일 뿐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시간으로 삶을 어지럽게 만드는 자신에 대해 진정한 분노를 느끼고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삶의 군더더기를 떼고 참된 영적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러 성당을 찾을 수 있다.

기도는 때로 한숨과 더불어, 때로는 감탄과 더불어, 때로는 절망이나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여정과 같다. 기도는 우리를 진정으로 종교적 인간이 되도록 이끌어준다. 그래서 기도 없이 참된 종교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과연 신자로 살아가면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물어보자.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 송용민 사도 요한 - 인천교구 신부. 강화본당 주임으로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이다. 1997년 사제품을 받고, 2003년 독일 본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상 속 신앙 읽기」, 「신학, 이해를 찾는 신앙」 등을 썼고, 다음카페 ‘신학하는 즐거움’을 운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글 송용민 · 그림 최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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