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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평신도 영성: 교회 안에 머물며 교회와 함께하는 평신도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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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4 ㅣ No.450

[평신도 영성 : 역사 - 중세] 교회 안에 머물며 교회와 함께하는 평신도 영성


우리나라 국민들이 민감하게 생각하고 반응하면서도 모순되게 행동하는 주제를 한 가지 꼽으라면 바로 ‘역사’일 것이다.

주변 국가들이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왜곡하면 전 국민이 분개하면서 주변국과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하지만 해마다 대학입시철이 되면 대다수 수험생들이 국사와 세계사 등 역사 과목을 시험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듣는다.

필자는 사람들에게 역사와 관련된 성경과 영성 과목을 가르쳐왔다. 그때 필자는 히브리 민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기원전 1250년경부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기원후 1세기경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소상하게 강의를 한다.

또한 필자는 초세기부터 21세기 초까지 2,000여 년에 해당하는 유럽 중심의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영성가들과 영성신학자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추구했는지 상세하게 강의를 한다. 그러면서 과연 필자는 3,000여 년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역사를 이만큼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곤 하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세의 유럽이 그리스도교 때문에 어두운 암흑기를 보냈다고만 어렴풋이 기억한다. 물론 일부는 그리스도교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자체의 역사 때문에 발생한 부분도 있다. 분명한 것은 중세 유럽 자체의 역사가 그리스도교와 관련되면서 그리스도교 구성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세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역사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중세 유럽 역사가 그 당시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 긍정과 부정의 영향을 동시에 끼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엘리트 수도자들과 무지한 평신도

고대가 끝나갈 무렵, 게르만 민족이 북방에서부터 유럽 본토로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서로마 제국이 5세기 말엽에 멸망한 후에, 8세기 말엽 카롤링거 왕조가 프랑크 왕국을 세워 유럽 본토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까지 유럽 전역은 혼돈의 시기를 겪어야만 하였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제대로 정착하여 살기도 힘들었고, 정규과정의 교육을 받을 수도 없는 이른바 암흑기를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6세기 초엽에 베네딕토는 한곳에 정착하여 사는 수도회를 설립하여 신앙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정착하여 사는 삶을 권장하였다.

6세기 말엽에는 대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북방 민족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북유럽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선교활동을 통해 수도자들은 유럽 전역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인들에게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더불어 9세기 초에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왕관과 칭호를 받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수도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또한 샤를마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통해 문화사업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는 상류사회 자제들에게 일반 교육을 실시하는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중세 초기 수도원은 더 이상 고대 이집트 사막의 수도원과 같이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해 선택하는 수도원이 아니라, 교회를 수호하고 널리 복음을 전하려고 인재들이 모여 더욱 제도화시킨 수도원이 되었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엘리트 수도자 들과 무지한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일반 신앙인들은 영성생활조차 꾸려나갈 수 없는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수도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시골지역에서는 무지한 평신도 그리스도인 중에서 선발된 사제가 본당사목을 담당하다 보니, 본인뿐만 아니라 일반 신앙인들의 영적 지도를 효과적으로 담당할 수 없게 됨으로써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더욱 황폐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왕족과 귀족의 후원을 받던 수도원에서는 수도원의 원장 직분을 왕족이나 귀족이 후원하는 상류계층 출신의 교육받은 평신도 그리스도인에게 맡기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그 결과로 때로는 결혼한 수도원장이 가족들과 함께 수도원 내에 거주하면서 수도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수도원장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평신도 그리스도인 자신도 종교와 세속 권력 사이에 끼어서 자신의 영성생활을 발전시킬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만에 떨어지기 쉬웠다.


영성생활의 동경과 개인주의적인 수도원 전례

비록 수도원이 여러 가지 이유로 세속권력에 일부 종속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7세기 이후부터 유럽 전역에 설립된 수도원은 선교와 신앙교육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을 보존하고 전하는 역할도 동시에 담당하였다.

더군다나 10세기 초에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를 구하고자 탄생한 개혁 성향의 클뤼니수도원은 짧은 시간 동안 같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수도원을 유럽 전역에 확산시키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곧 개혁 수도원은 무엇보다도 전례생활을 강조하면서 전례거행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중세 중기의 수도자들의 삶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영성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많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영성생활을 발전시키고자 수도생활을 동경하며 참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도원 전례는 수도자들에게 최적화되어 있어서 수도자들의 기도생활과 개인성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기둥과 기둥 사이마다 제대를 만들어놓은 고딕양식의 성당 구조와 맞물린 미사전례는 공동체적인 성격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극대화되었고, 수도 사제들이 일반 신앙인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라틴어 전례를 그나마도 개인기도 차원에서 작은 목소리로 봉헌함으로써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미사에 다가가기가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미사에 참여한 일반 신앙인들은 미사전례에 담긴 구세사의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거양성체 하는 사제의 동작에만 집중하면서 과도한 성체신심을 발전시켰다.

결국 신앙인들은 성체를 모시는 것을 등한시하고 현시된 성체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무미건조한 신심만 행하게 되었다. 게다가 13세기에 설립된 비(非)성직 수도자들이 중심이 되었던 탁발수도회는 미사전례를 거행할 기회가 적어서 주로 미사전례 밖에서 많이 배우지 않은 일반 신앙인들에게 쉽게 설교를 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의 인간성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 결과로 하느님의 구원역사와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는 전례정신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미사전례에서 분리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적이거나 미신적인 요소가 첨가된 올바르지 못한 신앙을 형성할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되었다.


사변적인 영성신학의 분위기 속에 나타난 이단

이렇게 중세 초기는 열악한 교육 여건 때문에 대다수 교회 구성원의 무지로 말미암아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중세 중기에는 반대로 세속 학문의 발전으로 교회에서도 사변적인 신학이 발전하였지만 과도한 엘리트주의에 머물면서,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 부정적인 영향들이 나타났다.

11세기부터 교회 안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스콜라 철학과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이성적으로 다가가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변적으로 설명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중세 후반에 와서 이러한 분위기는 급기야 영성생활 분야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됨으로써 실천적인 측면을 담고 있는 영성생활을 오로지 사변적인 측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알아듣기 어려운 사변적인 영성신학의 분위기에 반감을 가졌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본당이나 수도원 울타리를 벗어나서 연대하여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주로 독일 라인강 주변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요한 원천인 성경과 교회 전통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가운데, 임의로 해석한 방식에 따라 영성생활을 추구하면서 이단의 길로 많이 들어섰다.

결국 중세 전반에 걸친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다소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였다. 게다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교회 전통에서 벗어나 무엇인가를 시도하였을 때,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교훈은 중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영성생활의 길을 걸으려면 다소 투박한 모습을 하고서라도 교회 안에 머물면서 교회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 전영준 바오로 - 서울대교구 신부. 교황청립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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