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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교회가 가르치기 이전에 스스로 그 가르침을 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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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447

[세상 속 신앙 읽기] 교회가 가르치기 이전에 스스로 그 가르침을 살아야 할 때이다


교회의 가르침, 교회가 신자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계시된 진리를 보존하고 올바로 해석하며 전달하고자 받은 권한을 ‘교도권’이라고 한다. 과연 교회는 신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어떻게 받았고, 누가 그 권한을 행사하며,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일까?


교회의 가르침은 지금도 절대적인가?

교회가 곧 삶의 자리였던 시대에는 교회법과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진리였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교회가 세상의 일부가 되고, 종교적 삶과 신앙이 절대적이라고 믿지 않는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 더 이상 교회의 가르침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성직자들이라고 완전한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의 가르침이 다 옳다고 할 수 없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때로는 교회의 가르침이 시대의 요청에 맞지 않고, 현대인의 삶의 양태에 역행하는 것이라며 볼멘소리를 하는 신자들도 늘고 있다.

나주에서 사적 계시를 주장하는 이들은 교회의 부패와 교도권의 남용을 비판하고, 교도권이 계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힐난한다. 때로는 교회가 현대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생명문제, 환경문제, 노동과 인권문제 등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사회교리’의 입장에 대해 교회가 정치에 참여한다고 불평하는 신자들도 있다.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의 지킬 계명(윤리규범)에 대해 솔직히 신자들이 난감해 하는 주제들도 많다. 특히 혼전성관계, 낙태, 피임, 인공수정, 안락사 등의 성윤리와 생명윤리는 물론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인권과 정의의 기준에 대한 모호함, 그리고 생태계 보호를 위해 지켜야 하는 윤리규범에 대한 무감각 등 난해하고 민감한 주제들도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어디까지 지켜야 하고, 가르침의 권위를 지닌 교회의 성직자에게 무조건 순명해야 하는 것일까?


교회의 가르침은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모든 종교는 신적 가르침의 권위를 ‘성직자’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부여해 왔다. 그것은 그들 개인이 그러한 신적 권위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역사 안에서 제도 종교들의 가르침의 권위를 지탱해 주는 제도적 장치 또는 도구로서 이해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간직하고 전달하며 가르치는 권위가 예수님의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오는 ‘사도 계승성’에 뿌리를 둔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닌 신적 권위를 이어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된 진리의 교사로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가르침을 변질시키거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할 후계자들을 통하여 전수하는 방식으로 교회의 역사를 지탱해 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교회’란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백성 공동체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신앙적 신념으로 뭉친 인간의 제도화된 공동체이기도 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가장 보편적인(catholic) 하느님의 구원을 전하는 보편적 구원공동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로마’라는 독특한 라틴 문화권에서 형성된 제도와 윤리, 법적 질서들을 교회의 제도 안에 토착화한 교회이기도 하다.

보편적 교회인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신법적 질서를 성경의 규범과 교부들의 가르침 안에서 찾으면서 시대의 요청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가르치고자 노력해 왔다. 때로는 시대적 모순을 떠안고 잘못된 판단으로 교회가 혼란을 겪은 일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제도가 가진 역사적 오류로부터 교회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교회의 가르침이 신적 질서에 해당하는 신앙 교리와 신법에 해당하는 윤리 규범을 제외하고는 때로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례로 2000년 대희년을 시작하면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류 역사 안에서 로마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잘못된 죄책에 대한 공식적인 고백을 한 바 있다.

교황은 교회 분열의 책임, 유다인과 타종교인에 대한 박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 등 지난 2,000년 동안 교회의 구성원들이 범한 과오들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가톨릭교회가 정당하지 못했던 종교 재판과 마녀 재판, 십자군 원정, 갈릴레이 재판의 오류 등을 포함하여 교회의 교도권의 오류에 대한 죄책 고백이 포함되어 있다.


참된 권위는 신앙인과 통교할 때 인정된다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가르침이 그것이 신적 질서에 해당하는 신앙 교리와 윤리적 계명에 한할 때 진리의 성령의 보호로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교황과 주교들, 성직자들의 주관적인 판단과 가치관이 언제나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비록 교회의 성직자들이 진리의 수호자로서 올바른 교사들이라 하더라도 진리를 발견하는 인간의 한계와 오류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그 권위를 지키는 일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이후로 교황이 베드로좌에서 선언하는 가르침의 무류성과 전교회에 대한 수위권에 대한 절대적 교리를 하느님 백성 공동체 전체가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우고 지탱해 주시는 ‘초자연적 신앙감각(sensus fidei)’을 통해 “주교로부터 평신도에 이르는” 공동체적 합의(consensus)를 진리 발견의 중요한 요소로 재인식한 바 있다(교회헌장, 12항 참조).

이에 따라 교황은 사도적 권위를 지닌 주교단의 수장으로서 교회 일치의 봉사적 직무를 수행하며, 교회의 중요한 결정들과 진리들을 수호하고자 교황을 자문하는 추기경회의, 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 지역 주교회의와 협의체적 구조를 통하여 대화함으로써 가르침의 권위를 지켜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의 권위는 성직자들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권위는 봉사적 직무로서 이해된 교도권이 신자들이 가진 영적 식별능력과 신앙감각을 발견해 주고, 식별하며, 감독하여 올바른 그리스도 신앙진리 안에 머물도록 신앙인들과 통교(communio)할 때 받아들여지고 인정되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이 참으로 신앙인들에게 살아있는 권위와 비전을 제시해 주려면, 교도권이 시대정신에 대한 신학자들의 올바른 식별에 귀를 기울이고, 권위적인 방식이 아닌 삶의 권위가 바탕이 된 존경받는 권위로서 교회의 목소리를 외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순명이 맹종적 복종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신앙인들의 여정 속에서 함께 발견하고 지키며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이 된다면, 교회가 결코 우리를 오류에 빠뜨리는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는 확신도 우리가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교회가 가르치기 이전에 스스로 그 가르침을 살아야 할 때이다. 우리 교회가 오랫동안 김수환 추기경님의 권위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유도 그분이 삶 속에서 보여준 그리스도의 겸손한 권위를 교회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송용민 사도 요한 - 인천교구 신부. 강화본당 주임으로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이다. 1997년 사제품을 받고, 2003년 독일 본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상 속 신앙 읽기」, 「신학, 이해를 찾는 신앙」 등을 썼고, 다음카페 ‘신학하는 즐거움’을 운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글 송용민 · 그림 최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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