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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평신도 영성: 하느님 말씀은 나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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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445

[평신도 영성 - 실천사례] 하느님 말씀은 나의 등불


평신도 영성을 다루는 이 자리에서 저에게 주어진 주제는 평신도 영성 실천사례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저는 영성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인터넷으로 복음 해설을 제공하는 국제 사이트 Evangelizo(www.evangelizo.org)와 관련된 저의 체험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체험의 시작

평신도의 소명은 사제와 수도자의 소명과 다릅니다. 평신도의 길은 처음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정해진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일을 하면서 우연히 부르심을 받습니다. 지난 4월 저는 제가 번역한 책, 「피에르 신부 하느님과 함께 5분」을 친한 친구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저에게 “신부님 묵상도 좋지만 나는 언니가 복음을 직접 묵상한 내용을 듣고 싶어요.”라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았지만 날마다 그 친구에게 저의 묵상을 보낼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친구의 말을 실천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제가 매일 새벽 메일로 받아보는 ‘Evangelizo’의 복음해설이 떠올랐습니다.

로마에서 제가 「야곱의 우물」이란 잡지에 렉시오 디비나 원고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찾은 사이트인데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태리어를 잊지 않으려고 날마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읽던 것을 이 친구를 위해 번역해서 보내기 시작했는데, 차츰 친구들이 늘어났고, 평신도의 일상적인 영성훈련에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생각하기에 지금 이 사이트 안에 한국어 버전을 넣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날마다 저에게 도착하는 Evangelizo의 메일을 열 때마다 저는 갓 구워낸 신선한 빵을 받아 먹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를 위한 말씀의 빵이지요.

이 홈페이지를 열면 먼저 라틴어 로고가 눈에 들어옵니다. “Domine, ad quem ibimus? Verba vitae aeternae habes.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오늘의 복음(Daily Gospel)’으로 불리는 Evangelizo는 세속화된 세상에서 복음의 정신대로 살고자 2001년 두 명의 젊은 남자 평신도와 한 명의 수도자에 의해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vangelizo의 사명은 인터넷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사이트는 날마다 전례력에 따른 성경 본문과 성인들, 교회 박사와 교부들, 영성가의 작품에서 발췌한 복음 해설을 제공합니다.

이레네오 성인부터 샤를 드 푸코, 복자 마더 데레사,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복음 묵상은,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신앙 안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모든 사람이 날마다 아침에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이 내용을 받고 그것을 미사 동안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선교를 위해 현재 11개국 언어로 70명의 사제, 평신도, 수도자들이 팀을 이루어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체험을 통해 배운 것

제가 이 Evangelizo의 복음 해설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면서, 자신을 포함한 평신도들의 영성생활에서 왜 말씀이 중요한지 깨달은 것 세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복음 묵상은 말씀의 내면화 과정입니다.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이 일은 시간이 흐르면서 저를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데려가 저 자신이 먼저 말씀의 내면화 과정을 거치게 하였습니다. 단순히 좋은 성경 자료를 함께 나누는 것을 염두에 두었는데, 가끔 교부들의 성경 해설이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 또 너무나 바빠서 다 읽고 이해할 시간이 없으니 핵심을 요약해 달라는 친구들의 부탁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 해설만 번역하다가 나중에 제가 이해한 해설 내용을 짧게 요약해서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또 얼마 뒤에는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아들의 여자 친구인 개신교 신자를 보고 자극받은 50대 어머니를 도우려고 저의 짤막한 해설 앞에 ‘그날의 복음 구절’을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시간이 날 때 아무 때나 보내다가 나중에는 전날 저녁에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말씀을 품고 잠자리에 들면 의식이 말씀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면화 없이는, 자기화 없이는 참된 교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다교에서 내면화 과정은 아직 부모의 품 안에 있을 때, 어릴 때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시작한 이 말씀 사도직은 저의 영성생활에 큰 활력이 되었습니다.

제 일은 주로 성경과 관계된 일들이지만 성경을 가지고 하는 일과 자신을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내면화하는 것은 별개의 작업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낸 이들의 묵상

둘째, 복음 묵상은 교회의 전통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는 일입니다. 이 시대처럼 성경 말씀이 이단의 도구가 되는 시대에는 올바른 성경 해설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경의 가장 깊이 있는 해석은 경청과 독서와 꾸준한 묵상으로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형성되도록 내맡겼던 이들”(「주님의 말씀」, 48항), 곧 성인들에게서 나옵니다.

Evangelizo의 복음 해설은 바로 말씀을 삶으로 살아낸 이들의 묵상을 담고 있는데, 특히 우리가 평소에 찾아보기 힘든 교부들의 깊은 성찰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날마다 번역하고 묵상할 때마다 2,000년 동안 하느님 말씀을 해석해 온 교회 공동체가 오늘 우리의 삶을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경 해석이란 교회 공동체의 작업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1월 8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빵의 기적(마르 6,34-44 참조)에 대해 이렇게 설교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빵 다섯 개를 가져오라고 할 때, ‘우리는 나중에 어떻게 되라고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에서 찾아내라고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빵을 들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고 그 빵을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영광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이 거룩한 봉사로 그들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이 기적에 참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안에 있는 모든 것, 외딴 장소, 푸른 풀밭, 빵과 물고기라는 적은 양식, 이것을 모든 이에게 구분 없이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 그들 각자가 자기 이웃과 똑같은 음식을 갖는 것을 눈여겨보십시오. 이것들은 우리에게 겸손, 절약, 이웃사랑을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49,1-3).

씨 뿌리는 농부이신 하느님은 날마다 우리 마음에 말씀을 뿌립니다(마르 4,1-20 참조). 아침마다 복음 말씀이 하루의 일용할 양식, 사막의 만나처럼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오고, 저녁에는 하루 동안 받은 말씀의 은총이 작은 은총의 기도가 되어 하늘로 다시 올라갑니다. 이렇게 말씀의 순환이 없으면 우리 삶은 세상적인 것에만 머물게 됩니다.

셋째, 복음 묵상은 일상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훈련하는 소중한 영적 도구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작년 성탄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자기 것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안에 하느님께 내어드릴 공간이 없습니다.

매일 말씀과의 접촉은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을 기억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날의 복음 구절’은 많은 경우 하루 종일 제 의식을 지배하고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게 합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기억 훈련은 대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합니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이 바쁨 가운데에서도 사막의 고독을 맛보며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체험할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관상이란 말씀을 경청하고 실행하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는 것,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토머스 머튼은 그의 영적 일기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성경 읽기 체험을 이렇게 전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관상생활에 들어갈 수 있다. 장소가 어디이든지.’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관상생활에 불림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서서히 깨달아갑니다.”


결론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영성생활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흘러나옵니다. 평신도가 날마다 스스로 자신의 영성을 키워가는 훈련을 하는 데 복음 묵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은 우리에게 좋은 묵상 자료들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어떤 영적 수단이든지 자신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끼고 내면화할 때 진정한 힘이 있습니다.

* 임숙희 레지나 - 교황청립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로마서의 바오로 기도 연구’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교회의 신앙과 영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임숙희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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