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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부활의 영성: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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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444

[부활의 영성]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


발현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양식, 약 30년 말경 사용되던 양식은 다음과 같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

제자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목격하고 체험한 일이, 자신들의 온 존재를 바꾸어 놓는 깊은 신앙의 체험이기 때문에, 이를 중립적으로 대할 수 없었고, 이를 전달하려고 여러 가지 언명과 진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 전승은 다음 한 가지 사실에 일치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주님을 우리가 보았다.”

발현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로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복음사가들은 각자 나름대로 이를 전달하였다.

각 복음서가 예수님의 발현에 대해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하지만, 공통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님의 의도

부활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께 일어난 사건이고, 부활 신앙이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다가오심으로써 생긴 신앙이다. 주님께서 여자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시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항상 그분 측에서 의도를 가지고 나타나시고, 다가가신 것으로 이야기한다. 주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증인들은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예수님 부활의 으뜸가는 증인이었던 시몬에게 나타내 보이셨지, 시몬이 능동적으로 보았다는 동사로 표현되지 않았다. 시몬은 수동적으로,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셔서, 시각적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이는 예수님의 발현과정에서 행동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주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부활하신 분의 육체성

모든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당신임을 알리시려고, 음식을 드시거나, 몸을 만지게 하셨음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부활하신 분의 현실성과 육체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발현하셨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금방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온전히 살아계신 분으로 발현하신 것으로 묘사한다. 곧 영적인 존재, 죽은 혼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님을 말함으로써, 부활을 육신과는 분리된 영성 위주의 이원론으로 승화 해소시키려는 그릇된 시도를 물리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부활은 신화가 아니다. 곧 상상에서 나온 허구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의 것, 곧 이 세상의 시공간의 현실에 물질화시키고 한정시킬 수 있는 일도 아닌, 크나큰 신비다.

따라서 예수님의 발현에 대한 복음 구절을, 물증을 추적할 수 있는 사건을 기록한 글로 접근하기보다는, 발현하신 분을 체험하고, 온전히 그분에게 사로잡히고, 하느님의 신비에 눈을 뜨게 된 신앙고백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활하신 분을 만났다는 것은 계시의 체험, 어떻게도 부인할 수 없는 신비체험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불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들은 제자들은 불신과 완고함을 보였고, 복음서는 이를 숨김없이 전한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했음을, 또한 초대 공동체가 서서히 형성되면서 부활 신앙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험하면서, 불신을 버리고, 믿을 것을 촉구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발현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들은 열한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더더욱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나자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의 신앙이 역사적으로 출발하였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선교

십자가의 상처를 가지고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격려하시고 가르쳐주시고 위로하시고 지침을 내려주시고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시는 분이라고 복음사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불신과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질책을 당하던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곧 믿음의 시련을 겪은 사람들, 믿음에 실패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선교사명이 주어졌다.

사람들을 믿음으로 초대하려면,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했다. 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부활의 기쁜 소식의 기본요소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따른 것임을 말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제자들은 믿는 자가 되는 경험을 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키워갈 수 있었다.


기쁨

모든 복음서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넘치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심판과 벌이 내린 것이 아니라, 크나큰 기쁨이 주어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이 예언된 기쁨을 제자들은 넘치게 받았다.

기쁨은 우리 신체의 반응으로, 바로 현존하시는 주님을 발견한 징표다. 이 기쁨은 어린아이와 같은 기쁨, 삶을 충만하게 느끼게 하는 기쁨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이 그분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 기쁨이야말로 인간을 가르는 모든 두터운 벽을 무너뜨리게 한다.

기쁨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지고 계시다는 손길의 표징이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표징이다. 바로 이 기쁨이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게 한 힘, 자신들의 재산을 기꺼이 공동으로 나누면서, 함께 기도하고 일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힘이었고, 분열되어 있던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친교를 이루면서 살 수 있는 힘이었으며, 교회 안의 여러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해결하는 힘이었다.


공동적 증언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공동적인 증언에 유의해야 한다. 증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개인적으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을 서로 나눔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그룹을 형성하였다. 바오로 사도 또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경험을, 공동체와 떨어져,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에 따른 것처럼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도들의 증언에 권위가 있었다면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명을 바탕으로 공동체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도망간 제자들이 다시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복음을 전하고, 또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이를 계속했다는 사실이 바로 부활의 역사성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사실은 하느님 실재와 마찬가지로 오직 신앙만으로 다가갈 수 있다. 부활 신앙은 증언자의 신앙고백을 믿지 않고서는 접근할 방법이 없다. 그러다 보니 처음부터 의심이 따랐고, 부활을 허황된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

그러나 부활 신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는 사도적 증언이라는 기초 위에 서있다.

* 김미정 아녜스 - 프랑스에 있는 성안드레아수녀회 수녀. 신학과정을 모두 프랑스에서 이수하고, 파리 예수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지금까지 전임교수로 일하면서, 문화와 종교분과 책임을 맡고 있다. 불어로 「조화와 죄」를 출판하였고, 불어로 여러 공동저서를 출간하였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2년마다 한 학기씩 강의를 하고 있다(kmjagnes@gmail.com).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김미정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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