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부활의 영성: 복음서를 통해본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440

[부활의 영성] 복음서를 통해본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사도행전과 복음서는 다른 문학형태로 전달한다. 사도행전에서는 구원역사에 대해 말하는 사도들의 연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의 신앙고백 형식으로 전달하지만, 복음서에서는 ‘빈 무덤의 발견’과 40일 동안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을 통해서 이야기 형식으로 이를 전달하고 있다.

복음사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로부터 여러 정보를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파스카의 신비를 이 두 가지 주제를 통하여 전달하고 있다.


빈 무덤 이야기

빈 무덤 이야기의 유형학을 살펴보자. 복음서마다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과 시간에 대해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안식일을 끝내고, 새날이 시작될 무렵 주님을 따르던 몇몇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무덤에 도착한 여인들은 무덤을 막은 돌이 굴려진 것을 발견하고 놀란다. 무덤 안에서 예수님의 시신 대신, 흰옷을 입은 사람(또는 천사)의 말을 듣게 된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마르 16,6).

그리고 인간이 사는 장소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임을 말한다.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7).

요한 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여인들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인들의 두려움, 놀라움은 신성한 것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다. 이렇게 두려움에 대해 쓴 이유는 바로 여인들이 초자연적 빛 속에서 현시를 본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복음사가들은 이 이야기에 어떠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 했는가? 무덤이 빈 것으로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온전히 새로운 삶을 주신 것을 말하려 한 것인가? 왜 바오로 사도는 서간에서 빈 무덤 이야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빈 무덤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의 신앙과 증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활 신앙을 선포하는 데, 바오로 서간보다 뒤에 쓰인 복음서에서 빈 무덤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빈 무덤이 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덤에 대한 경배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제자들에게는 어떻게 거부할 수 없는 유일한 경험이었고, 만남이었고, 이 만남이 바로 부활 신앙의 근원이 된다.

모든 복음서에서, 이 경험을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이야기로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에 제자들이 애착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팔레스티나의 유다 공동체에서는 예언자나 순교자의 무덤에 대한 경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종교문화적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무덤을 중심으로 어떤 종교행위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에서 부활이 가장 먼저 선포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난 경험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려고 한 것이지, 유골이나 유물을 신앙의 시초로 시작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곧 빈 무덤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장소로 언급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상징하는 장소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 빈 무덤이 상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죽음의 장소는 더 이상 죽음의 장소가 아닌 희망의 장소라는 것이다.

두려움과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밤은 하느님께서 부활의 생명을 준비하는 밤이 되고, 이제 무덤은 열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죽음의 어두움에서 머무르지 않으시고 해방되심을 복음사가들은 빈 무덤을 통해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빈 무덤에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빈 무덤의 징표의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곧바로 승천하셨다는 것과, 무덤 밖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막는 데 빈 무덤 이야기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영혼의 부활만이 아닌 육신의 부활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을 육신과 영혼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인간 전체의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핵심 메시지

빈 무덤 이야기의 핵심은, 천사가 말한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여기에 계시지 않으시니,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주님을 찾지 말고, 산 자들 가운데서 그분을 찾고, 그분의 복음을 살아라.” 여인들이 추구하던 대상, 곧 예수님의 시신은 천사의 개입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로 바뀌게 된다.

이로써 부활 신앙은 예수님의 시신을 경배하려는 종교적 원의를, 인간과 함께하는 곳, 곧 갈릴래아로 나아가, 그곳에서 인간에게 희망을 전달하도록 하는 용기로 변화시키는 근원이 된다. 다시 말해 종교적 신심 추구가 아닌,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빈 무덤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의 신앙이 어떻게 생겼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결국 신앙인들이, 이 여인들과 동시대인이 되어 이 이야기를 듣고 초대 공동체의 부활신앙에 참여하라는 의미이다.

부활에 관한 신약성경의 전승은 사건을 중립적으로 보도하는 신문기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고백이요 증언이다. 예수 부활의 현실성은 이 현실을 전하는 증언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정말 부활하셨도다.”라는 초대 신앙인들의 고백 속에서, 바로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체험하게 된다. 이 고백은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될 것인데, 삶에서 경험 없이 예수님의 부활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요한 복음의 빈 무덤 이야기

요한 복음에서는 공관복음과는 조금 달리 부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가 등장하지 않고, 부재한 시신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상징적으로 다루면서, 신앙의 도상에서 ‘부재에서 현존’을 보게 한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말에 요한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으로 뛰어가고, 요한은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믿었다.”고 말한다. 이는 바로 시신의 부재를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현존하시는 분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믿는 내적인 눈으로 부재 속에서 현존을 사는 것이 신앙의 근본임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 현존의 신비는 여기저기 찾아다녀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동반하고 있고, 우리 안에 계신다는 믿음에 있는 것이다.

빈 무덤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로 하느님의 새날이 온 것을 의미하고, 예수님 몸의 부재는 예수님의 새로운 형태의 존재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숨을 쉬고 살면서도 삶의 의미를 잃고 시체처럼 살아가는 인생에게 새 생명을 넣어주는 메시지, 그래서 진정한 생명을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메시지를 빈 무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한다.

* 김미정 아녜스 - 프랑스에 있는 성안드레아수녀회 수녀. 신학과정을 모두 프랑스에서 이수하고. 파리 예수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지금까지 전임교수로 일하면서, 문화와 종교분과 책임을 맡고 있다. 불어로 「조화와 죄」를 출판하였고, 불어로 여러 공동저서를 출간하였다.

[경향잡지, 2013년 2월호, 김미정 아녜스]


80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