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설렘과 두려움의 교차로에 선 신앙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2 ㅣ No.439

[세상 속 신앙 읽기] 설렘과 두려움의 교차로에 선 신앙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언제나 맺고 풀어야 하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2년 전 사제생활 15년 만에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될 때의 일이다.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줄곧 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살다가 처음으로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움이 있었다.

수많은 신자들이 나만 바라보는 듯하고, 내 말과 내 손길에 모두가 관심을 갖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사를 해도, 강론을 해도, 신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레지오 훈화와 강복을 주고, 사목회와 단체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내가 느낀 점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의 교차였다.

분명히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과는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것에 대한 작은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쉬던 주일은 가장 바쁜 장날이 되고, 편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저녁시간은 수시로 신자들과 만나야 하는 술자리가 되었다.

밤 문화가 고요했던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밤 사목’이 중요해지기도 했고, 내가 필요하면 챙겨먹던 음식과 식사가 낮이면 자매님들 틈바구니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하는 식사가 되고, 남이 보면 백수건달처럼 보이는 화려한 외출로 이어졌다.

내가 할 일들을 내가 스스로 조절하던 때와는 달리 수시로 면담과 회의, 신자들의 전화와 병자성사, 장례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이전의 삶을 지탱하기에 힘겨운 시간들도 많았지만, 처음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내게는 새로움이었고, 때로 설렘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것은 설레지만 두려운 일이긴 하다. 그것은 이전에 해왔던 익숙한 것들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끝내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면 늘 마음에 미련이 남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더뎌진다.

그래서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한 것들을 가치있게 받아들이려면 인생에는 ‘맺고’ ‘풀어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늘 후회하고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삶을 살아야 하는 고뇌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신앙도 이와 비슷하다. 내가 하느님을 찾기 이전에 하느님이란 분이 계셨고, 그분이 먼저 나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교회로부터 배웠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잘 사는 길을 교회 안에서 배웠다. 교리를 먼저 배웠고,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가 무엇인지도 배웠다. 윤리적 가르침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는 기도법과 교회 예절에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이 언제부터인지 불편하고 피로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순진했던(?) 어린 시절의 신앙이 지나고 조금씩 머리가 커지면서 하느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있는 세속의 일이나 내가 관심을 가진 여가생활이 더 중요해졌다.

살다 보니 교회의 가르침이 거북하게 느껴지고, 가끔은 하느님 모르게 딴짓(?)도 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양심의 가책이 될 때에는 그래도 낫다. 어느 순간부터는 하느님이 정말로 계신지 의문이 들었고, 하느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 언제나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려움 속에서도 꽃피는 설렘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신자로서 교회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의무들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는 데 익숙하다.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것, 일 년에 한 두 번 판공성사를 보는 것, 교무금과 헌금을 내고, 가끔 교회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면 시간을 내서 노력봉사하는 정도면 신자로서 평균은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톨릭 신앙은 교회법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의무에 갇혀있는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분명히 그런 의무를 넘어서는 더 큰 매력이 있다.

신앙의 매력은 하느님을 만나는 두려움과 설렘의 교차로에 있다. 우리가 세상일에 빠져 하느님 없이 살 때는 모르지만, 문득 하느님을 떠나 살 때 느끼는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어 내 삶의 바닥을 느낄 때 우리는 다시금 하느님이 내 인생을 다시 잡아주실지도 모른다는 설렘을 갖는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칠 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하느님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통해서도 분명히 다른 뜻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확신의 설렘을 가졌다.

모세는 불타는 가시덤불에 다가서면서 신비감과 더불어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라는 말씀 앞에서 그분에 대한 경외감을 느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대천사의 수태고지 때 처녀로서 얻게 될 잉태의 두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천사의 말씀에서 표현할 수 없는 설렘을 느끼셨다.

신앙은 내가 겪는 인생의 어두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꽃피는 설렘과 매력이 있다. 마더 데레사가 자신의 인생에는 끔찍한 어두움이 있지만, 그 어두움마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하느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신앙은 선택되는 게 아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종교적 삶을 문화적 여가생활처럼 여기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세속적인 일과 종교적인 일이 부딪치면 적당히 타협하거나 우선순위에서 신앙을 뒤로 미루는 경향도 강하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들만 찾아 하는 이른바 ‘선택적 신앙’, ‘카페테리아 신앙’에도 익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신앙은 삶의 가치들 가운데 다른 것들 가운데에서 선택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신앙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고백해야 할 근원적 태도선택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결단이다.

교회 밖에서 세속화된 삶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냉담과 불신의 유혹이 크지만, 교회 안에서 자기만의 영적 평화나 사회적 동아리를 형성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도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신앙의 해를 살면서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를 더 잘 알거나 주일미사 참례와 같은 외적인 신자생활의 활성화가 아니다. 내가 믿음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게 대한 인격적 매력을 느끼고 그분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회심에 있다.

지금의 나는 과연 어디에 서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의무적인 신앙에 갇혀 사는지, 아니면 하느님께 받는 은총의 매력을 느끼는지 말이다.

* 송용민 사도 요한 - 인천교구 신부. 삼산동본당 주임으로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이다. 1997년 사제품을 받고, 2003년 독일 본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상 속 신앙 읽기」, 「신학, 이해를 찾는 신앙」 등을 썼고, 다음카페 ‘신학하는 즐거움’을 운영하고 있다.

* 최수화 파스칼리나 - 홍익대학교와 미국 캘리포니아미술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프랑스, 서울, 부산 등지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1983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부산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지금은 명예교수이다.

[경향잡지, 2013년 1월호, 글 송용민 · 그림 최수화]


1,19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