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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e-세상에서 영성을 살기: 장소 없는 공간, 진심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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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2 ㅣ No.438

[e-세상에서 영성을 살기] 장소 없는 공간, ‘진심’을 잃다


“그런 남자, 어디 있나요?”

요즘 세상 남자들이 미워하는 얄미운 남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모든 걸 바쳐 한 여자만을 사랑하겠다는 TV 드라마 속,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입니다. 게다가 이 남자는 최근 영화, ‘늑대소년’으로 나타나 사랑하는 한 소녀를 47년 동안이나 기다립니다. 그저 “기다려.”라는 쪽지 한 조각 남기고 떠난 그 소녀를 위해 말이지요. 세상 여자들은 한탄합니다. “아, 난 왜 저런 남자가 없는 거야!”

연애 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은 41세 미혼녀인 진숙 씨는 누군가 괜찮은 남자라고 소개하려고 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참,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드라마에나 있지요.”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좋은 남자’는 드라마 속에나 있고, 주변에 있는 현실의 남자들은 그저 그런 허접한 조연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믿을 사람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그려준 상상에만 존재하지요.

만질 수도 없고 맛도 향도 없는데도 실재하는 미디어 공간. 우리는 그 공간에서 흥분하고 감동하고 눈물도 흘립니다. 그러나 이 감동으로 내 인생에 어떤 변화가 올까요?

가족애에 관한 따뜻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진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동안 풀지 못한 가족 간의 갈등이 곧바로 해결될까요? 텔레비전에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아사 직전의 아프리카 아이들의 비참한 현장을 가슴 저리게 보았다고 하여 영양죽 한 그릇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할까요?

오늘도 수없이 쏟아지는 강렬한 이미지와 자극적인 정보를 소비하면서 우리의 감각은 세상과 소통합니다. 그렇게 시·공간의 경계로부터 이탈된 ‘장소 없는 공간’에서 흥분하고 웃고 울면서 세상을 배웁니다. 넘어져도 아프지 않고 총에 맞아도 죽지 않고 죽어도 살 수 있지만 오감이 충족되는 이중화된 공간, 이 안에서 우리의 감각은 갇히게 되지요.


‘보이는’ 사람이 되어 ‘보이는’ 사람만 봐요!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느끼는 대로 느끼는 데 익숙한 우리의 감각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깊은 내면의 것을 감각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찾는 데 더디고 ‘진심’을 알아채는 데 무뎌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요, 어떻게 평생 힘들게 모아온 돈을 그렇게 쉽게 기부해요? 세상에 유명해지고 싶어서겠지요?” 어느 위대한 자선가에 대한 한 초등학생의 반론에 선생님은 놀라 바라보지만, 다른 친구들은 “와, 너 똑똑하다!”라며 박수를 치며 동조합니다. 그 아이에게는 착하고 진실한 사람은 디즈니랜드에 살고 진짜 세상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만의 편협한 시선이라 책망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보이는’ 사람이 되어, ‘보이는’ 사람만 보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진심을 감각하는 데 무뎌지고 무엇을 믿고 의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가 그만 현실이 되었어요!

우리는 누구나 진실된 세상을 경험하면서 ‘진심’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진심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알아챌 수 있을까요? 옛 어른들은 “살다 보면 알게 된다.”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 삶의 공간은 살다 보면 알 수 있는 옛날의 그 장소가 더 이상 아닙니다. 수많은 사건과 상황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치면서, 아프고 시린 가슴을 눈물로 한숨 짓기도 하고 기쁨으로 끌어올리며 살아가는 그러한 진짜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그리고 텔레비전과 같은 ‘장소가 없는 공간’, 마이로비츠가 말하는 “감각을 잃은 공간”에서 너무도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살아갑니다. 진짜 세상과 소통하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리얼리티쇼, 다큐멘터리, 뉴스, 스포츠, 서바이벌게임 그리고 생방송 오디션 프로그램 속의 진짜 같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세상을 체험합니다. 물론 그 어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설정이라 할지라도 미디어 속 현실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그런데 어쩌지요? 보기만 해도 오감이 저리고 반응하고 행동하게 하니 말입니다. 진짜 상황보다 더 진짜처럼 연출해 놓은 가상현실에서 짜릿한 실재감을 누리는 쾌감은 배가 되니까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에 친숙해지고 그것이 그만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실’은 찾는 자에게만 존재해요!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가면’ 없는 삶이 거의 불가능하며 우리의 대인관계는 “상황조작에 따른 인상관리행위”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공감하기에는 너무 슬프지만,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보이는 외모나 학력 그리고 물질적인 재산을 앞세우지 않아도 그냥 서로를 바라봐 줄 수는 없는 걸까요? 못나 보이고 없어 보여도 그래서 사람들이 불러주지 않고 바라봐 주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서로의 진심만을 믿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소중하게 품고 보듬을 수는 없는 걸까요?

누군가 말하길 “더 이상 보이는 세상이 현실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꿈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디 있을까요?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진실’은 존재할까요? 어쩌면 ‘진실’은 더 이상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실’은 찾는 이에게만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쏟아지는 이미지와 정보 속에서 보이는 서사 너머 깊은 내면의 의미를 찾아 읽어보려 애를 쓰는 사람이 많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만나고, 조금 더 움직이면서 멈춰 돌아가면 어떨까요? ‘진심’은 불편한 세상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공기를 느끼고, 들리지 않는 숨결과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으면서 내면 깊은 ‘진심’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신앙, 가치, 교육 그리고 사랑, 모두 괜찮은 것일까? 나는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세상과 소통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오늘도 저는 컴퓨터 앞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합니다. 우리의 감각은 느끼는 데 있지 않고 행동하는 데 있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그리고 SNS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1요한 3,18 참조).


<더 공부하고 싶으세요?>

매체는 우리 삶의 환경을 규정한다

마셜 매클루언(1911-1980년)은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이자 문화비평가이다. 그는 매체환경은 인간의 감각기관의 확장을 가져왔고 이 확장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방식 그리고 지각방식까지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매클루언은 매체를 통한 최초의 감각적 효과는 지각의 마비현상이라고 말한다. 결국 매체는 우리 삶의 환경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이해」, 「구텐베르크 은하계」, 「미디어는 마사지다」 등의 저서가 있다.

* 김용은 제오르지아 - 살레시오수녀회 수녀. 부산 살레시오영성의집 관장으로 청년과 평신도 신심단체를 위한 현대영성 강좌 및 피정지도를 하고 있으며 여러 수도단체에 디지털 시대의 봉헌생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미디어생태학을 전공하고 버클리신학대학원 내 살레시오영성센터(ISS)에서 살레시오영성을 수학했다. 「세상을 감싸는 따뜻한 울림」, 「3S 행복 트라이앵글」, 「영성이 여성에게 말하다」 등의 책을 냈다.

[경향잡지, 2013년 1월호, 글 송용민 · 그림 최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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