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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세계의 첫 번째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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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6 ㅣ No.967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세계의 첫 번째 재건 (1)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카를 대제(768~814년)는 부친의 정책을 이어받아 그대로 추진해 나갔다. 그는 서구 유럽의 일치를 강화시켰고, 아라비아인을 북부 스페인으로까지 몰아냈으며 무력으로 작센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킴으로써, 왕국의 영토를 동쪽으로 더 확장시켰다. 또한 카를 대제는 교황청에 자신의 의견을 강요했다. 900년 성탄절, 레오 3세 교황은 로마에서 카를 대제의 머리 위에 직접 황제 왕관을 씌워 주는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게르만족의 흔적을 간직한 채 탄생한 새로운 제국은 로마제국을 계승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성립된 제국은 일치와 평화라는 하나의 이상을 영원히 구현할 것을 표방했다. 이 같은 이상은 정치 제도와 교회 안에서 모두 실현되어 갔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서구 사회의 두 축은 교황과 황제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카를 대제라는 새로운 황제가 불법적으로 황제 직위를 찬탈했다고 간주했다. 비잔티움제국 밖에 있는 자가 감히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세계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 세계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자들은 교회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교회의 특권을 되찾아 주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통치 이념은 결국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생겨나게 만들었다. 피핀의 통치 하에서 수도자이며 주교였던 보니파키우스는 게르마니아 교구를 재조직했다. 한편, 카를 대제는 많은 법령집을 편찬했는데 이런 법령집들은 주로 알쿠이누스와 같은 수도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카를 대제는 또한 프랑크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시도를 왕성하게 전개해 나갔다.

 

전반적으로 갈리아 지역에 팽배해 있던 전례 예식의 쇠퇴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카를 대제는 자신의 왕국에 로마 전례를 도입하여 강력하게 시행했다. 그러나 전례 개혁이 지나치게 구약의 정신으로 빠져 버린 나머지, 예식주의와 규정주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하여 공동으로 하는 기도가 소홀히 되었고 라틴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미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롭고 거룩한 공연이 되어 버렸다. 전례용이 아닌 일상적인 빵도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들었고 미사를 집전할 때, 사제는 신자들에게 등을 보이며 미사를 거행했으며 로마 미사 경본을 낮은 소리로 읊었다. 또한 사적으로 드리는 미사가 점점 늘어났다. 한편, 아일랜드 선교사들에 의해해서 전파된 《참회 규정서》(개별고백)가 엄청난 속도로 전파되자, 이를 중지시키고 옛 참회 전례(공개 참회)를 다시 도입하기 위해서 전례 법령집들을 만들어 냈다.

 

성직자 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카를 대제는 학문을 부흥시키기 위한 착수를 시도했다. 엑스라샤펠 궁내에 궁정 학술원을 설립해서 당대의 석학들을 불러 모았는데 대부분 수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과 전례를 연구할 뿐만 아니라 고전 라틴어를 다시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필사가들은 작업실에서 서체와 채식(彩飾, 아름다운 색을 칠하여 꾸미는 일)에 있어서 아주 훌륭한 많은 필사본들을 내놓았다. 이러한 학문의 부흥은 9세기 초, 절정에 달했다.

 

신학 분야에서도 위대한 학자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교회의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 라바누스 마우루스, 라트람누스가 성체 안에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리옹의 부제 프로루스는 당시 유통되고 있던 성경 본문의 내용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야말로 미신이나 지나친 성화상 공경을 가라앉일 수 있는 가장 좋은 치유책이라고 생각했다. [2018년 5월 6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세계의 첫 번째 재건 (2)

 

 

비잔티움제국의 흥망성쇠

 

비잔티움제국에서 발생한 모든 격렬한 군사적 혼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것은 100년 이상(726~843년) 벌어진 성화상 논쟁이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거나 그리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간주했다. 그러나 3세기 이후부터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카타콤바에 장식되기 시작했다. 그런 그림들 가운데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들이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성화상이 교육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한마디로 성화상은 ‘침묵의 강론’ ‘문맹자들을 위한 책’이었다. 성화상은 마치 성화상에 그려진 인물의 현존을 실제로 드러내는 것처럼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관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성화상 공경을 미신으로 간주하고 심지어 우상숭배라고 비난했다.

 

동로마 레오 3세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실 정문 위에 설치되어 있던 그리스도상을 파괴했는데(726년), 이 상은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경배했던 그리스도상이었다. 이 사건은 성화상 파괴 정책의 시작이었다. 황제는 민중들의 폭동과 수도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화상 파괴를 단행했다. 레오 3세 황제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었을까? 황제는 민중들의 신앙을 정화시키고 성화상 지지자들이었던 수도자들의 영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런 일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화상 파괴는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의 통치 기간(741~775년)에 극에 달했다. 수도자들은 성화상 파괴를 막다가 순교하였다. 결국 이레네(Irene) 황후가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화상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다시 평온을 회복했다(787년). 이 공의회는 제7차 일치 공의회로 성화상 공경의 합법성을 인정한 공의회였다.

 

그러나 813년에 다시 성화상 논쟁이 일어났고 843년에 가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성화상 논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회와 신자들이 성화상 파괴를 원했던 황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성화상(모자이크와 그림들)을 제작할 때에는 아주 엄격하게 신학적인 기준을 적용했다. 작가들은 성당 벽면에 위계질서에 따라 순서대로 그려 나갔다. 먼저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그리스도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하 경당에 성인들을 그렸다.

 

9세기 말, 서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지만, 비잔티움제국은 마케도니아왕조(867~1056년)와 마케도니아의 위대한 바실리우스 2세 왕에 의해서 찬란한 번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비잔티움제국은 군사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문학 작품들도 번성했지만, 훨씬 더 괄목할만하게 발전을 이룬 것은 수도 생활이었다. 수도자인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 북부에 있는 아토스산에 첫 번째 수도원을 세웠다(963년). 이 거룩한 산이 후대의 수도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장소가 되었고 동방 정교회의 영성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2018년 5월 13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 세계의 첫 번째 재건 (3)

 

 

복음화의 연속

 

동방과 서방이 정치적·국가적으로 위기를 맞이했던 기간에도 복음화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복음화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왕이나 교황이 조직적으로 복음 전파에 전념하기도 했다. 6세기 말, 대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영국으로 파견해서 교회를 다시 재건하도록 했다. 8세기 전반기에는 영국 수도자 ‘윈트리프라’라는 위대한 선교사가 서방에서 활약했다. 보니파키우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프랑크족 교회를 다시 조직했고 아주 많은 주교좌와 대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오늘날의 네덜란드에 살던 프리지안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했다. 8세기 말, 카를 대제는 새롭게 정복한 작센족에게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를 대제의 조언자이자 수도자인 알쿠이누스는 이런 식으로 그들을 개종시켜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리스어권(동방교회) 선교사들과 라틴어권(서방교회, 여기에서는 게르만족) 선교사들이 다뉴브강 유역의 평원에 위치한 슬라브족들의 나라에서 서로 협력해 가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게르만족 선교사들은 바바리아에서부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까지 복음을 전파했다. 이 무렵에 모라비아의 왕자는 콘스탄티노플에 사람을 보내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형제 두 사람을 파견했는데, 이들은 바로 키릴루스로 더 잘 알려진 콘스탄티누스와 메토디우스 형제였다. 그들은 모드 테살로니카 태생으로 슬라브어를 능통하게 했다. 그들은 최초로 슬라브어 알파벳을 창안했는데, 그때까지 슬라브어는 단지 문자가 아닌 말로만 존재했다. 그들은 성경과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바리아 주교들의 계략에 빠지고 말았다. 바바리아의 주교들은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를 자신들의 라이벌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들은 슬라브족에게 라틴 전례가 아닌 그 어떤 전례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 주교들은 기도할 때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 위에 써 놓은 세 가지 언어(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로만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형제는 로마로 갔고, 거기서 교황으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요한 8세 교황은 슬라브어 전례를 인가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에 콘스탄티누스(키릴루스)는 세상을 떠나 로마의 한 성당에 묻혔으나, 메토디우스는 모라비아 대주교로 지명되었다. 모라비아 대주교좌는 시르미움(현 미트로비카, 사베강과 다뉴브강이 합쳐지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884년), 게르만족 주교들은 새로 선출된 교황을 설득해서 슬라브어 전례를 단죄하는데 성공했다.

 

박해를 받은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불가리아로 피신했다. 아시아계 부족이었던 불가리아족은 슬라브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불가리아족은 키릴루스 알파벳과 슬라브 전례를 받아들였다. 그다음 세기에 러시아족이 키릴루스 알파벳과 슬라브어 전례를 사용했다. 그러나 10세기에 북쪽과 서쪽과 남쪽에서 새로운 침입자들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이 같은 왕성한 복음 선포 활동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았다. [2018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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