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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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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사목] 피로사회 탈출, 귀농: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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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9-17 ㅣ No.644

[경향 돋보기 - 피로사회 탈출, 귀농]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농부이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농부이시니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농부의 자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현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는 말씀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느님 아버지가 농부이신데 교회에서 농부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산업자본주의를 넘어 금융자본주의 시대로 발전하면서 돈이라는 자본은 인류를 위협하는 자충수로 변하고 말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은 돈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미래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안전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30년 넘은 핵발전소를 자본의 이익을 위해 폐기하지 않고 재가동했다. 핵발전소 1기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1천 개의 위력이다. 핵발전소 4기가 폭발했으니 원자폭탄 4천 개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원자폭탄 1개가 떨어진 히로시마 원폭피해는 지금까지 2-3세를 괴롭히고 있다. 4천 개의 원자폭탄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자본의 이익을 소중하게 여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다.

그 어떤 개발과 발전도 생명존중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생명의 존중 없는 자본의 이익만을 따른 결과 일본 전체 땅의 20%가 방사능 고농도 위험지역이 되고 말았다. 방사능 오염에서 해방되려면 300년의 긴 세월이 필요하다. 10세대를 거쳐야 하는데 10세대가 가기 전에 암이나 각종 희귀병으로 세대가 끊어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진단하고 있다. 생명보다 돈을 택한 결과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까지 혹평한다. 왜 이렇게 암담한 현실이 되었을까? 생명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를 선택한 결과다.

우리 사회 역시 일본과 다르지 않다. ‘경제동물’이라는 별칭이 붙은 일본인들보다 한국인들이 생명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에 더 많이 사로잡혀 있다. 돈이 우상이 되어버렸다. 단적인 예가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이다. 자본의 이익에 충실한 나머지 생명의 가치인 농업을 뿌리째 뽑아버릴 태세다. 삼성과 현대로 대변되는 극소수 대기업만을 위한, 상위 10%만을 위한 FTA이다.


가난한 이들은 누구인가?

작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농산물이 폭등했다. 올해는 가뭄으로 농산물이 폭등하고 있다. 국제곡물가 역시 이상기온으로 폭등하고 있다. 밀과 쌀의 국제곡물가는 몇 년 새 2-3배가 폭등했다. 지구온난화가 그 원인이다. 앞으로 일어날 크고 작은 전쟁의 원인은 물과 식량이 될 거라고 전문가들이 말한다.

지구온난화로 돈을 주고도 식량을 살 수 없는 시대가 곧 닥칠 것이다. 자동차를 뜯어먹을 수 없고 핸드폰으로 밥을 지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마치 자동차를 빵처럼 뜯어먹고 핸드폰으로 밥을 지어 먹을 것처럼 수출산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앞으로 지구온난화는 식량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식량위기, 농업의 위기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오히려 FTA를 통해 한국농업을 말살하려고 한다.

교회 역시 생명의 가치를 첫자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생명의 가치를 첫자리에 두고 살아가는 농업과 농민에 대한 관심은 코끼리 비스킷 정도다. 한국농업을 초토화시키는 FTA에 대해 적극적인 노력과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생명농업은 농촌사목전담이나 우리농촌살리기 지도신부, 우리농 활동가와 소비자와 가톨릭농민회 등 일부의 관심사에 지나지 않는다.

농촌의 몰락은 심각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어진 지 오래다. 간간히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도 타국에서 시집 온 이주여성들 덕이다. 이러한 농촌의 현실은 소명의식을 자극했다. 사제서품 때 제단 앞에 엎드려 서약한 성경말씀을 되새기게 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공동번역 루카 4,18). 사제서품 당시 성경말씀은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가?’ 끊임없이 자문하게 했다. 나에게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가? 내가 투신해야 할 가난한 곳은 어디인가? 나에게만큼은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들이 농민이었다. 하느님의 창조의 눈으로 볼 때 한국사회의 자연은 가난한 곳이 되어버렸다.


벌이 전멸할 정도의 환경

두 해 전 여름, 비가 지긋지긋하게 내렸다. 한봉이 바이러스 전염병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전국 수십 만 통의 한봉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한봉의 죽음과 우리의 삶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몇백조 마리의 벌은 꽃가루를 옮겨서 수정을 도와준다. 곧 자가수정이 불가능한 꽃과 과일과 채소의 열매가 열리도록 협력한다. 한봉이 그렇게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양봉도 전멸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한봉과 양봉이 전멸한다면 인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과일, 채소, 곡식의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 것이다. 90%의 인구가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벌이 전멸할 정도의 환경이라면 다른 동식물들도 전멸할 수 있다. 인류의 멸망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가난한 이들인 자연과 농민에 대한 소명의식을 자극했다. 자연과 농민을 선택하려고 시골로 들어가게 되었다.

농촌에 들어온 지 4년이 되었다. 일도 함께 하고 밥도 함께 먹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혼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혼자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급자족을 희망하는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고 밥 먹고 일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피를 나누고 함께 살아온 가족들도 함께 살기가 쉽지 않다. 할머니, 부모, 손자 3대가 함께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남남이 함께 산다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가족수도회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신부님의 “수녀원이나 수도회를 만들었으면 몇 개를 만들었을 것이다.”라는 고백을 뼛속 깊이 공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풀을 뽑으면서 블루베리를 따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하늘을 보고 농사를 짓기에 하루하루의 삶이 기도의 삶이 될 수밖에 없다. 노동이 기도가 된다는 말을 비지땀을 흘리며 배우게 된다. 또한 영성의 완성은 노동과 말과 행동의 삶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셨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다. 일할 수 있다는 건강,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지 않는가.


“평생 땅이나 파먹고 살아라”

어릴 적 어른들이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평생 땅이나 파먹고 살아라.” 하고 욕을 했다. 그 말이 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농사를 배우면서 그 말이 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해발 450미터의 진안고원에 자리를 잡았다. 포도나무 200주 정도를 심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나면 100주 정도의 포도나무가 죽었다. 영하 25도의 추위에 얼어죽은 것이다. 포도나무를 뽑아내고 추위에 강한 블루베리를 심었다. 철제 파이프로 비가림 하우스를 만들어놓았기에 굴삭기가 들어갈 수 없었다.

사람의 손으로 포도나무를 뽑고 구덩이를 파야 했다. 삽과 괭이로 5개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나면 등에 뱃가죽이 달라붙는 것 같았다. ‘아, 땅을 파는 것이 이렇게 힘드니까 어른들이 평생 땅이나 파먹고 살라고 했구나.’ 그때서야 그 말이 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농사를 배우면서 ‘그렇구나, 농민이 가장 거룩한 일을 하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 미사가 최고의 기도다. 그 미사의 중심은 성체성혈이다. 밀농사를 짓는 농부가 없으면 밀떡인 성체를 만들 수 있을까?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가 없으면 포도주인 성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렇구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거룩하고 위대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바로 농민이구나.

우리의 생명을 누가 키워줄까. 부모일까? 그렇다면 부모의 생명은 누가 키워줄까? 할아버지 할머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를 키워준 고마운 존재를 밥이라고 말하지 않고 부모와 조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밥없이 살 수 있을까? 밥은 어디에서 왔을까? 농부가 씨를 뿌리고 하늘과 땅이 키워준 노동에서 왔다. 우리는 농부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데 농부의 고마움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불효자식과 같다.


생명을 바쳐 생산한 농산물을 푸대접하는 사회

최근 성인사망자 가운데 남자는 3명 중에 한 명이 암으로 죽고, 여자는 4명 중에 한 명이 암으로 죽는다. 의료기술이 발달해서 평균수명이 높아지고 국민소득이 높아졌는데 왜 암으로 죽는 사람이 늘어만 가는 것일까? 바로 농약이다. 농약으로 땅이 죽어가고 있고 농산물이 오염되고 있다. 우리농 매장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기농산물을 먹는 것은 우리 가족을 지키는 일이고 땅을 살리고 농촌에 희망을 주는 일이고 농약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는 일이다. 농약으로 벌레들의 천적인 제비가 사라졌다. 그러니 벌레가 더 많아졌고 농약을 더 많이 하게 된다.

농약으로 땅이 죽어가고 물이 오염되고 물고기가 죽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은 섭취가 높아지고 있다. 농약의 여러 성분이 잘 섞이도록 수은을 첨가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싱싱한 채소만을 찾기에 농민은 농약을 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생명을 바쳐 농사를 짓는 사람들, 자신의 고통을 뿌려 생명을 가꾸는 사람들, 하지만 농민은 우리 사회에서 푸대접을 받는 사람들이다.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 농사. 정부의 농민 홀대로 농산물이 투기가 되어버린, 그래서 농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만 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마저도 생명을 바쳐 생산한 농산물을 푸대접하고 있다. 우리농 매장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본당의 수에 비하면 5%내외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얼굴이며 세상의 모습이다.


생명의 가치를 높이고 농민에게 희망을 주는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 빼고는 다 한다. 자식사랑이 유별나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식이 의사와 판사 같은, ‘사’자가 들어가는 출세를 하길 원한다. 그래서 70평 아파트와 외제차를 타고 다니길 희망한다. 그 ‘사’자가 들어가는 출세를 시키고 싶은데 먹는 것은 대충 먹인다. 햄버거 통닭 소시지 등 아무거나 사준다. 암 발병의 가장 큰 원인이 식생활습관에 있다. ‘사’자가 붙은 자식이 아무거나 먹어서 나중에 암이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어떤 출세를 했을지라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아파트 50평에 살면서 농약을 친 농산물을 먹는 것보다 20평에 살면서 친환경농산물을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백화점에 가서 비싼 명품 옷을 사서 입으면서 농약을 친 일반농산물을 먹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농약을 친 농산물을 먹고 암이 걸린다면 그 비싼 명품을 어디에다 쓸 수 있을까?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제초제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지만 팔 곳을 찾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돕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길이다. 생명의 가치를 높이고 농민에게 희망을 주는 우리농 매장은 우리 건강과 직결된다. 우리농매장이 우리의 건강인 것이다.

우리 농민들이 생산한 유기농 친환경농산물들이 교회에서만이라도 불티나게 팔릴 수 있도록 도시소비자들의 마음이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우리 농민들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 농사가 잘 되든 못 되든 감사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 농민은 당신의 모상인 인간의 생명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대접 받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사회와 교회와 우리를 이끌어주소서. 아멘!

* 최종수 윤호요셉 - 전주교구 농촌사목 전담 신부. 전북 진안에서 만나생태마을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9월호, 최종수 윤호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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