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통일사목] 광복에서 통일로: 이긴 자가 모두 가져가지 않는 사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8-18 ㅣ No.637

[경향 돋보기 - 광복에서 통일로] 이긴 자가 모두 가져가지 않는 사회


두개의 문 : 갈등과 죽 음의 문, 소통과 삶의 문

“죄송합니다, 판사님.” 법정에 선 형사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는 경찰청 정보과 형사였다.

2009년 1월 19일 아침 출근길에 그는 용산에 있는 남일당이라는 건물 옥상에 철거민들이 망루를 짓고 있다는 정보보고를 들었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옥상에 있던 농성자들과 구청, 재개발조합을 오가며 협상을 주선하기 시작했다.

농성자들은 건물 아래 있는 경찰들을 멀리 뒤로 물리면 내려가서 협상을 하겠다고 했다. 형사는 이들의 협상의지를 확인하고 다행이다 싶어 희망을 가지고 상대를 설득했다. 하지만 구청이나 조합은 대화를 거부했고 경찰 역시 뒤로 물러나는 걸 반대했다. 그리고 테러 진압을 전문으로 하는 경찰특공대를 투입했다.

형사는 절망감을 느끼며 협상 주선 노력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망루에는 그 지역에서 수십 년간 장사를 해 오던 영세상인들 십수 명이 있었다. 금은방, 짜장면집, 호프집, 복어탕집. 50대 아저씨 아주머니들에서 칠십대 노인까지 그저 어느 거리 어느 뒷골목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들. 운동권의 ‘운’자도 모르는 이들이 무슨 테러범이라고 대개가 공수부대 출신인 특공대를 그리로 올려 보냈는가.

테러범은 ‘섬멸’의 대상이지만 일반 국민들이 농성을 한다고 섬멸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건물에서 나가지 않으면 재판을 해서 집달관이 명도를 하는 것이 법치국가의 기본이거늘 명도라는 민사 분쟁에 경찰이 끼어드는 건 정당한 공무집행이라 할 수가 없었다.

비록 건물주인은 아니었지만 이들의 노력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장사가 잘되어서 땅값도 올라간 것이므로 재개발을 이유로 노력의 대가인 권리금 한 푼 못 받고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에 내몰리는 건 우리 헌법 정신에도 반하는 거였다. 법원도 이를 고려해 세입자들의 이해관계를 도외시한 재개발법이 위헌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한 상태였다.

공수부대 출신 경찰특공대와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도심 한복판에서 벌인 전쟁. 그건 전쟁이었다. 살려고 올라갔던 노인이 까맣게 불에 타서 내려온 전쟁.

형사는 “어떻게 제대로 된 협상 자리 한 번 없이 이 지경으로 사람이 여섯이나 죽어나간 건가요.”라면서 법정에서 계속 눈물을 흘리다가 결국에는 잠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형사를 증인 신문하던 나도 목이 메었다.

형사는 잘나가는 경찰청 정보과 자리를 버리고 말단 파출소 도보순찰대에 자원해 내려갔다.

치솟는 불길 속에 무너져 내리는 저 용산 망루는 바로 우리 사회의 현재를 정확히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을 다룬 다큐 영화 역시 그랬다. 이게 사람 죽이는 전쟁이지 어디 공권력과 국민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 아비규환을 겪은 노동자와 가족들은 벌써 22명이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병으로, 또는 제 손으로 삶을 마쳤다.

나는 용산 법정에서 이렇게 변론했다. 이 참사의 주범은,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자본과 이를 지켜주는 정치권력, 출세에 눈이 먼 경찰 간부들, 제 어머니, 형님뻘인 철거민 아저씨, 아주머니들에게 웃통 벗어 부치고 겁주고 다닌 용역깡패들, 아니 일확천금을 바라고 뉴타운 분양권 하나 얻어보려고 발버둥 친 나와 너, 우리 모두라고.


승자독식의 세상

오래전 스웨덴 출신 그룹 ‘아바’가 ‘위너 테익스 잇 올(Winner takes it all)’이라는 노래를 불러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긴 사람이 모두 가져간다는 뜻인데 지금 우리 사회가 꼭 그렇다.

이건 아마도 해방 이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세력 다툼을 벌이면서 이긴 쪽이 모두를 결정하고 진 쪽은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하는 상황이 된 데서 비롯된 거라 여겨진다. 1950년 한국전쟁이 그 정점이었다.

이익과 가치를 적절히 나누어 가지는 시스템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그냥 이긴 쪽 말이 다 옳고, 이긴 쪽이 모든 이익을 다 가져가려고 죽기 살기로 싸웠으니 세월이 갈수록 그 다툼은 더 치열해져 갔다.

얼마 전 인터넷에 오른 글을 보고 가슴이 섬뜩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보수 정권이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야 남쪽 사회에 있는 좌파들을 다 잡아다가 처치할 수가 있다니. 6 · 25 때 빨갱이니 보수 반동이니 하면서 서로 집단 학살했던 일이 그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겠구나!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 누명을 쓰고 수십만 명이 어느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총살되어 묻혔다. 얼마 전 대법원은 국가 잘못을 인정하고 그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항소심은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유가족들 청구를 기각했지만 대법원은 유족들이 지난 세월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할 수 있었을 걸로 기대하기 어렵고, 국가가 이제 와서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우리 민법의 기본 원리인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재판을 하면서 나는 유족들에게 그랬다. 앞서의 인터넷 글을 인용하면서, 증오의 피해자인 여러분이야말로 이런 증오를 화해와 관용으로 바꾸려고 노력할 수 있는 가장 적임자라고.

어쨌든 해방 이후 시작된 이데올로기 갈등은 남쪽에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지상주의가 거의 종교적 신념 단계에까지 가면서 점점 더 확대 재생산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와 보수 간 극심한 대립. 서로 상대를 공격할 때는 이런 점잖은 말도 쓰지 않는다. ‘빨갱이와 수구꼴통.’ 경제적으로는 극심한 양극화. 가진 사람은 더 빨리 더 많은 돈을 벌고, 없는 이들은 점점 더 가난해져서, 부와 가난은 세대를 이어 대물림한다. 사회적으로는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 개발에서 보듯 개발과 성장에 모든 게 다 있다고 믿는 이들과, 사람과 사람 그리고 자연과의 상생을 찾는 사람들 사이의 견해차.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은 타고날 때부터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도록 되어있다. 처해있는 입장도 서로 다르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얻게 되는 이익과 손해의 대차대조표도 완전히 다르다. 비가 오면 짚신 장사가 울고 해가 나면 나막신 장사가 운다. 이렇게 생각도 다르고 손익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갈등이 있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가치와 이익을 승자가 모조리 가져가는 시스템에 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를 보라.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지지자들이 정말 무섭게 싸웠다. 택시 기사와 승객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운동 단체 동료끼리 원수처럼 싸웠다. 이기는 쪽에서 모든 걸 가져가니까.

4대강을 둘러싼 갈등을 보면 승자독식이 모든 다툼의 근원임이 더 분명하게 보인다.

수만 년을 이어온 저 강들의 물길을 막고 바꾸는 건 대통령이나 어느 집단의 생각, 이해만으로 결정될 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 어마어마한 대 역사를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되니 이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절망하는 것 이외에 달리 더 할 일이 없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길거리에서 억지 전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러는 우리 자신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 그런 성향들을 다 가지고 있다. 내 생각이 옳고 내 말이 맞다. 다 이리 생각하고 살아들 간다. 누구나 다들 우주의 중심은 자신이라고 여기고 살아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다. 그러기에 쌀이며 돼지고기 같은 남의 생명을 희생시켜 살아가면서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사람 하나하나는 전혀 별개의 우주라 할 만큼 세상을 보는 방식이나 성향이 서로 다르다. ‘애니어그램’이라는 성향 분류체계는 사람들 성격 유형을 9가지로 나눈다.

간디 같은 1번 유형 사람들은 만사를 옳고 그름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이게 옳은가 그른가부터 따진다. 마더 데레사 같은 2번 유형들은 이 상황에서 저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를 생각한다.

클린턴 대통령 같은 3번은 이 일을 어떻게 잘 처리할 것인가. 바깥세상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주로 관심이 가있는 4번 개인주의자들, 세상과 자신에 대해 근본을 알고 싶어 하는 석가모니 부처나 스티븐 호킹 같은 5번 탐구자들, 주어진 역할과 상황에 충실한 전통적인 한국 어머니 상 6번, 세상은 즐기며 사는 곳이라 여기는 7번, 모차르트, 권력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8번, 그리고 세상만사를 평화롭게 느끼는 9번 평화주의자들.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다들 그 상황을 바라보고 대응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남들도 다 자기 같을 거라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전혀 납득이 가질 않고 따라서 상대방을 자기 기준에서 비난하고 갈등이 시작된다.

이런 성향 차이에 더해서 이성과 합리적 사고의 수준에서 사람마다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건 사회 전체가 수준이 올라가면 개선될 여지가 좀 있긴 하다. 옛날엔 사람을 찢어 죽이는 오차 같은 잔혹한 형벌도 당연시되었지만, 이제는 사형 자체의 폐지를 논하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않았는가.

저마다의 성향과 합리적 사고의 수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나만 옳다고 내 방식대로 4대강 파헤치고 법도 마구 바꾸면 갈등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이해와 가치의 공정한 배분

상생법을 둘러싼 대기업형 유통업체와 재래시장 같은 동네 상권 사이의 갈등도 그렇다. 우리 사회가 고도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덩치 큰 대기업과 영세상인들은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걸 그대로 내버려두면 모든 이익은 강자가 독점하게 된다. 이는 결국 우리 사회에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올 게고 사회적 긴장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면 용산의 망루처럼 갈등이 불타올라 모두가 공멸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꽁꽁 묶어 매고 있는 각 분야의 무서운 갈등은 궁극적으로 나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 그리고 이익을 독점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저주스러운 매듭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가치와 이익을 어느 한 쪽에서 모두 가져가지 않고, 골고루 배분하는 것이다. 정치체제나 경제, 사회적 관계에서 여러 세력들이 골고루 가치와 이익을 나누어 가지도록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만이 갈등을 끝내고 소통과 화합, 관용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다.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은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과도한 경제력을 가진 소수의 강자나 그러한 강자 집단의 전제에 맡기거나 한 정치단체나 어떤 강대국들의 전제에 맡겨져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각계각층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또 국제 관계에서는 모든 국가가 경제 진로에 적극 참여하여야 한다….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 저 재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외적 사물을 자기 사유물만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한다”(65.69항). 곧 재화를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도록 사용하라는 뜻이다.

용산 남일당 망루에서 활활 타오른 저 불길은 우리 모두의 욕심 탓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해방 이후 지난 60년간 우리는 이 두 개의 큰 산을 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 이긴 자가 모두 가져가지 않는 사회다.

* 김형태 요한 - 변호사.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산하 사형제폐지소위원회 운영위원장.

[경향잡지, 2012년 8월호, 김형태 요한]


1,27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