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전례ㅣ미사

2014년 2월 2일 주일 주님 봉헌 축일[봉헌생활의 날 유래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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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 [kyungju46] 쪽지 캡슐

2014-02-01 ㅣ No.1273

 

 



2014년 2월 2일 주일

주님 봉헌 축일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예수께서 성전에 봉헌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제정한 ‘봉헌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뜻 깊은 축일을 맞이하여 봉헌의 참된 의미와
우리 삶에 대해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브란트 아기예수의 성전 봉헌 


지영현 신부(가톨릭미술가협회 지도신부)

이 작품의 공간은 예루살렘 성전이고, 등장인물은 시메온과 한나 그리고 성가정입니다. 이 작품에서 빛은 한 곳이 아닌 두 곳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는 벽면의 창틀 그림자를 통해 보이는 자연의 빛이고 또 하나는 아기 예수님의 후광입니다. 자연의 빛은 기둥 뒷면의 어둠을 약하게 비추지만, 아기 예수님의 후광을 통한 빛은 매우 강렬하며 자연의 빛을 압도합니다. 이는 시메온의 예언처럼 아기 예수님이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루카2,31-32)’이심을 나타냅니다. 한나가 두 손을 활짝 벌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모습은 아기에 대한 축복과 함께 평생 경건하게 살며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드러냅니다. 또 기둥 옆에 꺼진 촛불은 이제 구약이 끝나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계약의 시대가 왔음을 암시합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통해 감각적인 빛과 어둠을 넘어 영적이고 깊은 인간 내면의 빛까지도 표현하고 비춥니다. 그리하여 깊은 어둠 속에 숨겨진 구원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기다림을 아기 예수님의 빛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2월호]

 

 

 

봉헌생활의 날 유래와 의미

봉헌, 친교, 선교 의미와 주님 부르심 되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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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성대서약식을 마친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활짝 웃으며 수도형제들과 친교를 나누고 있다.
예수 성탄 후 40일째인 오는 2월 2일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봉헌생활의 날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7년 주님 봉헌 축일을 '봉헌생활의 날'을 제정한 것은 온 세계 모든 봉헌생활자들, 곧 수도자들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는 봉헌생활의 참뜻과 부르심을 되새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에 앞서 1996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아 교회와 세상 안에서 봉헌생활과 그 사명에 관한 교황 권고 「봉헌생활」을 발표, "교회 사명의 결정적 요소인 봉헌생활은 교회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면서 봉헌과 친교, 선교라는 세 측면에서 봉헌생활의 큰 은혜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계기로 삼았다.

봉헌생활의 복음적 토대는 예수님께서 지상생활 동안 일부 제자들과 맺은 '특별한 관계'(마태 17,1-9 참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제자들이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맞아들이고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본받아 자신의 삶을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삶(마태 4,18-22: 마르 1,16-20 참조)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것이 봉헌생활의 기초를 이룬 셈이다.

이에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살도록 초대를 받았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응답으로서의 수도생활은 동ㆍ서방교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동방 교부들은 수도생활의 복음적 가치에 주목했다. 동방의 수도생활은 끊임없는 찬미와 기도, 영성적 권유, 자선활동을 통해 진정한 영적 인간이 되려는데 목적을 뒀다.

베네딕토 성인의 영향을 받아 현재의 형태를 갖춘 서방의 수도생활은 세속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을 추구하며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최우선으로 삼고 그분께 자신을 봉헌하는데 중점을 뒀다. 이러한 수도생활은 수도회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삶의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청빈과 정결과 순명이라는 복음적 권고를 서약하고 공동체 생활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이를 통해 수도자들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보여주는 표징의 역할을 하고 있다.

수도생활은 크게 관상에 전념하는 수도단체들과 '사도적 수도생활'을 하는 남녀 수도회들, 재속회, 사도생활단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오로지 관상에 전념하는 수도회, 곧 관상 수도회들은 자신들의 생활 전체와 모든 활동을 하느님께 대한 기도와 관상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교회 공동체 앞에서 주님께 대한 교회의 사랑을 증언하며 눈에 드러나지 않는 사도적 결실을 통해 하느님 백성의 성장에 공헌한다.

활동 수도회들은 다양한 사도직과 선교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 사랑의 증인이 되고 하느님 나라의 표지가 된다.

또한 재속회는 세속 현실 한가운데서 복음 권고의 선서를 통해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추구해왔으며, 세속 사회의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문화와 경제, 정치 생활에서 지혜의 누룩이 되고 은총의 증거자가 되려 한다.

남녀 사도생활단은 특유한 방식으로 특수한 사도적 목적이나 선교 목적을 추구하며, 특별히 선교 지역의 복음 전파와 자선 분야에서 성덕과 사도직의 수많은 열매를 거뒀다.

최근 들어서는 기존 수도회와 유사하지만 새로운 영성과 사도적 열정에 부푼 봉헌생활의 새로운 형태가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따른 새롭고 쇄신된 형태의 봉헌생활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세속화로 치닫는 세상에서 '신앙의 소금'이라 할 봉헌생활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교회와 사회는 하느님과 이웃에 자신을 완전히 봉헌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느님 아버지의 부르심과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며 '갈라지지 않은 마음'(1코린 7,34)으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려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특별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어렵다고 용기를 잃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열정으로 봉헌생활에 투신해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새롭고 활성화된 봉헌생활의 영성적, 사도적 공헌을 교회와 세상이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4년 1월 26일, 오세택 기자]

 

 

봉헌의 의미

봉헌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바치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신의 마음에 들고 신은 그에게 어떤 혜택을 줍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과 신 사이에 일종의 거래가 성립됩니다. 신에게 먼저 무엇을 바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봉헌은 우리가 마치 어떤 힘 있는 사람으로부터 혜택을 받아내기 위해 취하는 행동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적 봉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래가 아닌, 감사의 행위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바칠 때, 어떤 이기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참된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봉헌은 먼저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하물며 그 대상이 하느님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봉헌하는 내용물이 순수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양이 아니라 질을 따지십니다. 그분은 부자의 금화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더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우리 마음과 사랑이 담기지 않은 봉헌물은 하느님 보시기에 별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불가에 삼륜청정(三輪淸淨)한 보시(報施)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누가 보시를 할 경우, 먼저 보시하는 사람 쪽에서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과시나 생색내기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시를 받는 사람 쪽에서도 당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보시는 부처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기에 얽매임 없이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보시하는 물건 역시 흠 없고 깨끗해야 한다고 합니다. 부정하고 불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소중하고 필요한 물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참된 보시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가의 이런 가르침은 우리 봉헌에 무언가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불순한 동기로 주어지는 선물이나 호의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부정부패를 낳는지 자주 경험합니다. 불순한 동기로 무엇을 주거나 받을 때, 그것은 뒷거래를 낳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봉헌, 깨끗하지 못한 봉헌물, 무엇을 받고 당당하지 못한 태도 등은 모두 참된 봉헌을 가로막는 요소들이라 하겠습니다.

 

 

참된 봉헌

여기서 우리는 참된 봉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 동기의 순수성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참된 봉헌은 사랑의 봉헌이어야 합니다. 봉헌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일뿐입니다. 봉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도에 따라 우리 봉헌의 가치는 평가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는 봉헌이 사랑의 지고한 표현일 때, 그것은 최상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봉헌은 자기 자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봉헌은 가장 완전한 봉헌입니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참된 봉헌은 자발적인 봉헌이어야 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위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내어 놓게 합니다. 타인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서 하는 봉헌은 참된 봉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봉헌은 사랑에 의한 자발적인 봉헌이어야 합니다. 사랑과 자발성 이 두 가지 요소 중 하나가 결핍되었을 때, 참된 봉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봉헌

수도생활을 흔히 봉헌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봉헌생활의 날을 수도자들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의 경우는 우리의 전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서원은 바로 이 봉헌을 공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서원의 내용들은 우리의 구체적인 봉헌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에 의한 자발적 봉헌, 곧 내어드림입니다. 봉헌생활은 비단 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이미 하느님에게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삶 자체가 사랑에 의한 자발적인 봉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을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생명이나 재능, 부,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봉헌은 감사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을 다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욥의 다음 고백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기 1,21).

 

봉헌생활의 의미

형제자매 여러분, 봉헌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둠을 비추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빛의 축일’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일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여 성당과 각 가정에 비치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되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세례에서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에 하나의 빛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써 어둠을 밝히는 빛을 발산합니다. 예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 자신을 온전히 태우심으로써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여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전례가 주는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봉헌생활의 두 번째 의미는 주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만남의 축일’이라고도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함과 동시에 시므온과 안나가 구세주를 만남도 기념합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의 구원자, 빛이 되어 오신 분을 만나 기쁨에 넘칩니다. 봉헌생활은 바로 주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시므온과 안나처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평생을 주님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야(말라 3,3 참조)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이 세상에 빛의 역할을 다하며 주님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봉헌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기해 우리 봉헌의 의미를 새롭게 하여 우리 삶이 주님께 합당한 봉헌이 되도록 다함께 노력합시다. 아멘.

[말씀자료 : 허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넥디도 왜관 수도회
 

 

 

 

 


편집 : 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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