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의 수덕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7 ㅣ No.359

기도의 수덕


수덕이란 단어는 보통 금욕이나 고통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기도는 고통스러운 활동이 아니라 기쁨의 근원을 제시하는 즐거운 활동이다. 수덕에 대하여 더 말한다면, 수덕이란 행복하게 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다. 즉 수덕은 행복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수덕이란 어휘의 근원을 찾아본다면 수덕은 몸부림이다. 이러한 몸부림은 쾌감을 줄 수도 있다. 수덕이란 어려움을 극복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모든 균형 잡히고 균형 있는 활동과 같이, 수덕은 자기-조절을 요구한다. 이러한 견해는 모든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나 특별히 시간경의 전례에 적용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특정한 문제와도 연관된다. 여기에서 이 문제를 다음의 질문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어떤 형태의 수덕을 요구하는가?”


1. 기도에 시간을 바치려는 마음의 준비

기도에 시간을 바치려는 마음의 준비는 기도의 수덕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적이어야 하며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말한다면, 현대인에게 있어서 기도의 수덕이란 주로 시간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현대는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인다. 이 자체로는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슬퍼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글이 있다.

“20세기에 있어서 시간은 모우터 때문에 아주 감정이 격해 있다. 중세기에는 가장 큰 병이 혹사병이었다. 20세기에는 speed이다.” 어떤 이들은 이 병을 “자동차 승용 열병”이라고 명명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이 병 때문에 죽지는 않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이 병을 앓고 있다.” 모든 것이 속력을 올리고 있으며 같은 비례로 시간이 더 걸리고 있다.

현대 교회와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현대 생활의 또 다른 두 가지 요구인 “sessionites”와 “reunionitis” 때문에 결론을 얻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고 있다. 이와 같이 시간 절약을 시도하여 창안해 놓은 것들의 효능도 보통 기대한 것보다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교통의 편리를 위한 새로운 발명은 인간이 움직여야 하는 영역을 넓혀 주었다. 1세기 전에는 집에서 일터까지 걸어서 30분이 걸렸다. 그러나 현재는 거주지에서 작업장이나 사무실까지 차나 기차로 가기 때문에 역시 30분이 걸린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불평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대면하는 것이며 이러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동차에 의하여 얻은 시간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잘 사용하지 않는다면 잃어버리게 된다. 자동차가 빨리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우리들에게 위험은 더 크다. 자기조절이란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상황을 조절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양적인 면이 아니라 우리가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문제이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지가 문제이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은 어디에 살든지 관계없이 모두 하루에 24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문제되는 것은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시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이다. 객관적으로 보는 시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인간은 얼마만큼의 시간을 마음대로 처리하는가? 기도의 수덕이란 이러한 시간을 처리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수덕의 형식은 대부분 우리가 속하고 있는 사회의 유형에 크게 좌우된다. 사회의 유형은 아마도 자연적인 사이클로 규제를 받고 있는 “전통적인” 형태와 대단히 산업화 된 “현대적인”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실제로는 오늘날 모든 사회가 산업화되어 가고 있다. 사회문제 역사가들은 전례 행위란 시간을 통괄하는 방법의 하나였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시간을 규정하는 최초의 수단인 달력은 종교적인 기원을 갖는다. 종교적 사이클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제 일을 마쳐야 하는지를 정하고 언제 일을 해야 하는지를 정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확실히 고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우리 현실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생활의 리듬을 형성한다는 것은 하나의 작업이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서는 일은 하나의 여가선용이기도 하다. 몇몇 나라에서는 이미 일주일에 4일 일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 “일하는 사람의 생활은 그의 일보다도 그가 여가 선용을 위하여 보내는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즐겨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자신이 하는 실제의 일보다 축구 팬으로서 혹은 칠장이로서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세속화된 시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러한 시간을 종교적인 리듬에 맞게 해야만 하겠다.

“달력이 있게 된 것은 확실히 시간을 조절하기 위한 최초의 노력의 표시이다.” 최근까지 발견된 전례적인 책들에서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달력이나 일정표를 작성하는 데에는 종교적인 영향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달력은 우리에게 오늘날의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이제 거룩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었던 달력은 세속적이며 개인적인 일기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옛 교훈이 적용 안 되고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오래 기억할 수 없는 새로운 의무들을 적어 둘 필요가 있다. 일기는 우리들의 업무들을 질서 있게 정리할 수 있어서 유용하며 두 사람의 활동을 서로 맞출 수 있어서 유용하다. 엇갈리는 사건의 연속이 점점 더 확대되고 복잡화되는 이 사회에서는 휴대용이나 탁상일기는 절대 필요하다.

인간은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현세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그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기 위하여 이러한 도움이 필요하다.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 있어서는 사회 종교적인 측면이나 다른 복합적인 사실 때문에 시간 조절을 하여야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지향에 따라서 좌우된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용기이며 우리의 의지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마치 중요한 날짜를 기억해야 되는 것처럼 자기의 일기장에 “기도”를 적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

현사회 안에서는 일기를 많이 쓰고 있는 편이며 형식적이며 사회적인 인간관계는 좀더 복합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나 시간을 조절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주관을 가져야 된다. 시간 자체가 종교적이거나 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견해는 이제 없어졌다. 오늘날 이같이 복잡한 사회 안에서 인간이 처리하고 있는 기간은 제한되어 있으며 또한 시간은 세속적이며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의 언어적 표현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처리할 시간이 대단히 적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시간을 소비하였다, 보냈다, 잃었다, 얻었다, 구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시간을 죽였다’고도 표현한다. 이는 우리가 쓸데없고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시간을 채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시간은 생산과 소비에 사용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도하기 위하여 보내 시간은 겉보기로는 소비된 시간이요 결실 없는 시간이다. 여기에서 “겉보기”라고 말한 이유는 실제로 이러한 시간에 내적으로는 한 인간의 회개가 극치에 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외적인 성취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시간에 대한 수덕은 희생이다. 우리는 외적인 결과를 거부해야 한다. 우리의 지능에 대한 순간적이며 문화적인 풍요로움을 거부해야 하며 어떤 기쁨이나 여가를 거부해야 한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의 사업을 번창시키기 위하여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창조주시요, 구세주이신 분과의 관계를 맺어주는 기도를 잘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시간을 잘 조절해야만 한다. 기도 시간을 잘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시간에 대한 수덕은 또한 청빈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소유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를 부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은 대개 가난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즉, 시간을 활동으로 채우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런 사람은 자신들이 시간을 적게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대부분 시간의 노예가 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기도로 바친다는 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얼마간의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 능률을 많이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일을 하는 것까지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무엇인가를 포기하면서 기도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기도의 가치에 대하여 확신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만이 이와 같은 포기를 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시간의 주인은 우리가 부여하는 시간의 가치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위하여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보여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기도 사도직은 기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실천된다.

이와 같이 기도에 대한 수덕은 지성적 수련을 전제해야 하며 기도해야 하는 인간 - 의무의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신학적 의미는 단지 하느님을 위하여 일정한 양의 시간을 바친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또한 시간의 질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다. 현대의 소용돌이치는 삶 안에서 기도의 수덕은 노력을 의미한다. 기술적인 작업과 과학적인 연구와 사목적인 활동에만 지나치게 몰두하고자 하는 인간 경향에서 탈피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에 접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이와 같이 기도한다는 것은 나약한 인간인 우리에게는 힘든 “비약”이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영혼으로 온전히 살아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을 끊임없이 묵상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도 창조의 고통을 겪고 있는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마음에 새길 능력이 없다. 만일 “끊임없이 기도하는” 습관이 우리 안에 없다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생각할 능력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을 초월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포기는 아마도 우리의 활동에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왕국 건설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바친다. 이러한 포기는 또한 애착을 끊는 경우에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의 물건들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애착심 없이 이 세상의 물건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좀더 넓고 깊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의식적으로 있으려하는 우리의 기도 활동에서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과 세상을 초월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우리가 내적으로 자유롭다는 견지에서 하나이다. 어느 정도 우리의 내적 본성은 피조물로부터 우리를 이탈하도록 도와준다. 피조물들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려는 우리의 지향을 끊임없이 감소시키고, 얽매어 없애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도란 단지 하느님을 위하여 일정한 시간만을 내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시간은 특은 받은 은혜의 시간이며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게 하는 많은 장애물들을 의도적으로 극복하여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평정의 시간이며, 이때 우리는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요구에로 돌아가게 하는 시간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불림 받았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도는 “full-time”의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기도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준다. 이러한 기도의 의미를 이해하였고 기도에 대한 맛을 체험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기도할 시간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활동을 좋아하게 되면 우리는 그 활동을 위하여 시간을 마련한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바쁠지라도, 스포츠나 유도를 좋아한다면, 바쁜 생활 중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현명하게 시간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음으로부터 이러한 운동에서 요구하는 준칙들을 지키고 좀더 잘하기 위하여 힘들고 고된 기술을 통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기도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기도를 잘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대한 맛을 알아야 하며 기도함으로써 그 맛을 개발해가며 자기의 것으로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2. 교회의 지침에 따를 자세

시간경의 전례는 권위를 가진 교회로부터 각자에게 부여된 기도이다. 이러한 시간경은 두 가지 의미에서 포기를 의미한다. 첫째는 형식으로 짜여진 시간경 전례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자발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가 사용해 왔고, 선택할 수 있는 기도의 형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포기의 의미는 우리의 자유를 확실히 더 누리게 하며 좀 더 넓은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첫째로 주어진 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닦게 되는 수덕은 우리의 자발성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인위적이고 어색한 규제를 받는 동시에 일시적 기분에 휘말릴 가능성을 갖는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향에서 조화를 잘 이루게 하려면 활기차고 세련된 자유를 충분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덕을 쌓는다는 것은 간결하게 말해서 우리의 자유를 교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와 같이 기도 생활에 있어서도 우리의 자유는 항상 새로운 활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련된 자기 수련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마땅히 긴장을 풀게 하여야 하며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도는 마땅히 자연스러워야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기도는 심리학적인 설명이기보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숨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어떤 질서나 훈련의 성격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특별히 교회의 기도로써 드릴 때는 이러한 성격을 갖는다. 모든 기도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부활하신 성령의 활동이기 때문에 모두 교회 안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모든 개인적인 기도는 교회의 기도이다. 이는 보편적인 기도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그 사람은 또한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가 보편적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경우는 교회의 기도가 될 때이다. 교회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도를 정하고,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보급하는 기도를 바칠 때 그 기도는 보편적이 된다. 즉 이러한 기도는 전례적인 기도이다. 마치 모든 다른 인간 활동이 그러한 것처럼 전례적 기도 또한 일정한 법이 있어야 하며, 그 법칙을 지켜야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화가 자유롭고, 긴장을 풀게 하며 자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 접하려면 우리 스스로 듣고 말하는데 있어서 예절 있는 언어의 사용이 몸에 익숙해 있어야 하며 실제로 자연스럽게 언어의 사용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정담을 나눌 수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으려면, 우선 문법을 익히고 받아쓰기도 해 보고 진력이 날 수도 있는 책읽기 습관을 드린 후에라야 가능하다. 이 모든 과정은 더 자연스럽고 풍부한 표현력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개발하여야 하는 방법들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하여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기도는 어느 정도의 훈련 없이는 결코 유익할 수도 없고 기분을 돋구어 줄 수도 없다. 침묵의 습관과 끈기 있는 노력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는 우물을 파고 사막을 가로 질러 갈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의무와 일정한 형식으로 드리는 기도의 의무는 즉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시간경의 의무는 아무 근거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기도에 대하여 알아야 하며 마음으로부터 이 기도를 사랑해야 한다. 수덕이란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우리의 품성을 발전시키는 것이며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 하는 일을 좀 더 뜻있게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법칙”이란 행동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며 강요된 의무와 목적이 없는 감정의 발산을 서로 규제하여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다. 우리는 양극단에 치우치기보다 중도적 역할을 선택하여야 한다. 법칙이란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주는 것이다. 유일한 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인간이며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아빠를 항상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법칙”의 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옛 인간의 타성의 힘으로부터 즉 죄 많은 인간의 상태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며 모든 정신적인 활동, 특별히 기도의 활동을 저해하는 인간의 성향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 바울로께서 말씀하신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죄를 극복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 수덕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유를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수덕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특별히 기도할 결심을 하는 것이다. 수덕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경향의 방향을 잡게 되고 또한 우리의 내적 경향을 키우게 된다. 또한 평화를 누리게 되며, 마음의 집중을 하게 되며 하느님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된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며 그분과 깊은 대화를 유지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얼마나 전통 있는 확실함이 있는가에 대하여 많이 거론된다. 권위 있는 근거는 때때로 자발성과 혼동이 된다. 자발성이란 무의식의 의지나 순간적인 느낌이나 인상에 우리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라고도 본다. 자유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발적이다. 그러나 자발성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위하여서는 인간은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여야 하며 온전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제하고 주관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가 작성한 시간경 전례는 우리의 자유로운 자발성을 행사할 계기가 되며 모델이 되고 교육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시간경은 확실하고 권위 있는 공동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이러한 시간경 안에서 우리는 개인의 상이점을 서로 존경해야하며 서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양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된 개개인의 특성을 서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더 나아가서 시간경은 어떤 구조와 규칙을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감상적으로 되지 않게 도와준다. 이와 같이 제시된 시간경을 우리 스스로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다. 시간경 전례는 또한 우리의 게으름을 극복하게 도와준다. 우리는 보통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배고플 때 먹는 것과 같이 우리는 기도할 필요를 느낄 때에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신체적인 기능에서 느끼는 것과 같이 영신적인 필요를 그렇게 예민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영신적인 필요에 예민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즉 어떻게 식별하여 알 것인가를 배워야만 한다. 자고로 이러한 능력은 교육으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 경험있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야 한다.

이와 같이 교회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초대하는 동시에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권고하고 모델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편협된 자기주장에서 탈피하여 진정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와 같이 교회가 제시하는 방법과 모델을 하나의 지나쳐 가는 수단으로만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제시를 잘 이용하며 깊은 감명을 받도록 사용하여 우리의 내적 생활의 한 몫을 차지하게 할 것인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우리의 심리적 경향은 항상 부활하신 예수의 성령 안에서, 성부께 대한 아들의 자세를 느끼게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이러한 단점을 감안하여 우리를 상기시키며 이러한 생각을 매순간 의식할 수 있도록 돕고 우리가 어떻게 의식한 바를 생활화 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높이 평가되는 일본의 문화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차(茶) 예절은 유연성이 있으면서도 아주 엄격한 예절로서 자연스러운 인간 교류의 예로 행하여져 왔다. 이와 똑같은 이론으로 교회 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도의 형식은 우리가 선택하지도 않았고 만들지도 않았지만 기쁘게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평화의 분위기와 안정된 기분에 젖게 우리를 도와준다. 이러한 형식에 적응하여 나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수덕이며 수덕을 전제로 한 노력의 결과이다.


3. 전 우주와 교류를 가진 준비

기도에서는 자발성과 자유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뿐 아니라 개인과 전 우주와의 조화가 또한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즉 우리들 각자가 좋아하는 주관적인 기도와 개인의 요구보다는 많은 이들에게 유익한 교회가 제시하는 객관적인 기도 사이에서는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직감적으로 생각할 때, 하느님과 깊은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려고 한다면 오직 외적인 고정된 형식을 통해서 만날 수 없는 것 같이 생각된다. 나의 마음은 이러한 형식이나 말로써 내 자신을 전부 표현할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이와 같이 특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법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도리어 기도하고 싶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는 것같이 보인다.

여기에서 다시 문제되는 것은 포기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덕은 우리가 가진 영적인 부를 깊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다. 말하자면 기도 중에 포기해야 한다는 견해는 기도의 다른 면을 말하는 것이다. “한마음 한뜻으로” 하는 일에는 언제나 은총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기도 중에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며 이러한 상호 관심은 일치의 표시이며 수단이다.

“내 이름으로 둘이나 셋이 함께 하는 곳에는 나도 그들 안에 있겠다.”

내가 만일 전 신비체의 가장 승화된 활동에 참여하려면 나는 복음 안에서 말하는 의미로서 나의 삶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혼자 있다면 무엇인가 주려고 할 것이며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나의 주관적인 경향의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그 결과 나의 체험은 아주 깊게 느끼게 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주관적인 체험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너무도 빈약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내 취향에 맞는 개인적인 편견을 극복해야한다. 나는 내 자신을 초월해야 하며, 내 자신에서 탈피해야하며, 나의 운명을 우주와 함께하기 위하여 내 자신에게서 소외되는 것 같은 기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명실 공히 “가톨릭”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기도문은 외부로부터 오는 권위에 의하여 주어졌기 때문에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도문을 이해하고, 이 기도문이 내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하여 객관적으로 근거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물론 주어진 기도문이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전혀 객관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면 그러한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은 전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경우 나의 경험으로는 그 내용이 너무도 이질적이 되어서 기도에 잠길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마음에도 없는 기도문을 암송한다는 것은 자발적인 기도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아주 위험한 모험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어려움을 앞질러 인식하고 개인의 기도를 위하여 교회가 제시하는 기도문과 개인이 기대하는 기도를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교회는 “이미 만들어진” 기도문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과거에는 성사 예절서나 설교지침에서도 경우에 따라서 사목적이거나 개인적인 필요에 적응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본 기도문과 전문도 실려 있으며 매일 다른 독서를 제시하여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전례적인 책들은 끊임없이 발전을 보여 주었으며 새로운 기도문이 항상 첨가되었다. 현재에도 새로운 미사 경본은 이와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모인 회중에도 맞게 적용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규모에 있어서 일정한 양식 안에서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미사나 성무일도는 형식에 얽매인 기도문을 모은 책이라기보다 영감을 줄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기도책이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배려로 말미암아 개인 기도를 잘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기도책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전례책은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이라기보다는 모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신앙의 틀 안에서,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교회의 기도는 개인이나 그룹의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넒은 의미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기도문은 기도를 시작하기 위한 발판으로 잘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점차 우리의 자유를 교육한다. 한편 일정한 한계성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자유로운 능력을 연마한다.

교회가 왜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는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미사 전례에 있어서, 신자들의 기도는 원래 틀에 박힌 것이었는데 지금은 다양한 지향을 갖도록 영감을 주는 기도문이 되었다. 모든 인간의 발전은 어떤 모양으로라도 자신에게 죽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보다 넓은 관계를 창조함으로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전 우주와 합일하고자 노력하면서 개인적인 한계와 우리 자신의 작은 범위를 초월하도록 해야 한다.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타자(他者)인 그분과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우리의 이기주의를 희생하여 바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빠스카의 신비 안에 서로를 나누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는 몸에 배인 이기심을 인정하고 이러한 이기심을 억제해야겠다고 겸손되게 고백해야한다. 그리고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모델의 수단을 받아들여야 한다. 보편적 기도가 될 수 있는 불가결한 조건(Sine qua non)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조건 안에서, 자유는 발전하고 꽃피운다. 부활은 죽음 뒤에 있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자제력을 연마한 대가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부한 의미를 가진 사랑의 개념을 가진 아주 넓고, 가없고, 무한한 통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들의 마음 안에 이러한 사랑의 교류의 가능성을 쏟아 주시고 계신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이야기할 때, 그들은 의무로써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친근한 욕구로써 이야기한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자신을 잊어버리는 집중력을 요구한다. 이와 같이 또한 기도를 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수도 생활에 대한 감상적인 취향보다도 하느님 왕국에 대한 우리의 갈망과 우리 안에 내재하는 바람에 좀 더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기도란 주어진 시간에 우리가 모든 다른 관심사를 뒤로하고 진정으로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것이며 객관적인 권리에 관하여 그분과 함께 계속 담화하는 것이다. 개관적인 진리란 그분 자신에 대하여 드러내시는 계시이다. 이러한 객관적 진리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이해가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편적인 교류는 교회의 기도 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러한 교회의 기도는 어떤 형식으로 되었는지는 문제되지 않으며 또한 이 교회의 기도를 혼자서 했을 때라도 교류는 있게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확인하고 제시하고 반복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영양분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게 듣지 않는 위험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 우리 자신에게만 말하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교회가 제시하는 영감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생명 없이 될 수 있는 빈약한 주관주의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만일 우리가 기도 중에 공상 없이 우리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에 관해서 영성적으로 비추어주는 계시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살펴 우리는 기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진실된 영성적 자신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의 영성적인 면과도 통교를 갖는다는 사실을 존경하게 된다.

현대에 있어서 많은 이들, 특별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왜 함께 기도하기를 좋아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함께 살기를 좋아하고 그룹으로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함께 기도하기도 좋아한다. 그들은 공동체로 기도를 하게 될 때 적용되는 수련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컨대 준비할 시간을 마련하고, 다른 사람들의 표현 방법을 존중하고, 그들의 지향을 존경하며 침묵이 그들에게 필요한 다른 것 등을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대가를 치름으로써, 각자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함께 받게 된다. 개인적인 자기 포기는 집합적인 풍요함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이와 같이 매순간 우리는 교회가 제시하는 개관적인 모델에 따라서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우리의 개인적인 자세와 보편적인 교류를 화해시킨다. 이와 같이 우리가 비록 혼자 있다 할지라도, 직접적인 공동체와 함께 있지 않더라도 교류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4. 문화적인 차이점을 극복할 준비

끝으로 오늘날 특히 어렵다고 느껴지는 기도의 수련이 하나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정신적인 성향과 시간경 전례에서 제시하는 것 사이에서 생기는 문화적 장애를 극복해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시간경은 시편과 전례에서 제시하는 것 사이에서 생기는 문화적 장애를 극복해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시간경은 시편과 전통적으로 읽혀 내려온 독서뿐만 아니라 성서에서 뽑은 독서로서 구성되었다.

현재 모든 것은 모국어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적인 어려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아주 강하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기도문의 형식에 있어서도 오늘날의 형식을 사용한다면 훨씬 쉬울 것이다. 오늘날의 형식이 우리에게 더 친근감이 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기도문을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셈족의(Semitic) 사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속해 있는 문화에 뿌리 깊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또한 성서에 나오는 사상구조에 동화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성서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성서는 하느님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알려주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그분과 맺는 하나의 수단이다. 마치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로부터 미사성제를 받는 것과 같이 우리는 전통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미리 정해진 형식 안에 있는 우리가 자유로운 적용을 전제하는 형식으로서 미사성제의 신비를 함께 나누는 것과 같다. 성서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기도는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상황으로 우리를 몰입시킨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가 아니 언어의 형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언어문화를 초월해야 된다는 초대를 받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한계성을 넘어서야 된다는 초대를 받는다. 이러한 문화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수련은 전세계와 교류가 넓어지면서 더더욱 우리에게 요구된다. 사회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와 같은 생각으로 이야기하거나 생각지 않는 외국인들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이러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구약과 신약이 형성된 세계의 문화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너무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실제로 이러한 공부를 하면서 무엇인가 우리의 사상을 포기해야 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를 위하여 꼭 필요한 노력을 하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이 경험 - 우리 시대 혹은 우리 현대의 경험 - 이 특유한 것으로 우리 자신의 경험만을 믿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우선 없애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이 세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비젼(Vision)을 높고 크게 갖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서로의 관점이 다르면 다를수록 우리는 서로 노력을 함으로써 더욱더 풍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긴 구원의 역사 안에서 우리 자신의 위치를 가져야만 한다. 이러한 거대한 이론을 실현할 수 있는 구원의 장(場)은 교회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짐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 자신을 연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수덕은 겸손해 진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열거한 바를 종합하여 볼 때 우리는 기도의 수덕에도 여러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우리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과의 깊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사랑을 기초로 두고 인간적이고 내적인 일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관장하여 잘 사용하여야 하며, 우리들의 자발성까지도 통제하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열성이야말로 기도의 수덕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닦음으로써 우리 자신이 자유롭게 되며 나아가서는 신비 체의 우주적인 모든 차원을 포용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기도에 관한 이러한 수덕의 관점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백성의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참된 관계를 발견하게 하며 우리 자신의 관심으로 얽매인 우리의 범위를 탈피하게 도와준다. 이는 우리 세대의 순간 순간 사로잡히는 열정을 적절하게 연결시켜준다. 그래서 교회의 보편적인 기도에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를 병행함으로써 형제들과 하느님의 현존을 현실화하게 된다.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수련”(수덕)이란 말은 그리스도교의 단어로 처음 사용될 때부터 항상 투쟁(노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는 항상 이 단어에 함축되어 있으며 항상 타당하다. 교회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었으며 그 중에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논문 제목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한 단어의 내력 안에서 이러한 의미가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수덕이 의미하는 어휘의 근원에서 나타난 신비스러운 몸부림은 우리의 생활 안에서도 계속되기를 바란다. “기도는 많은 경우에 하나의 몸부림이며, 그리스도 자신도 체험하셨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싸움을 거절하고자 합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의 뜻과 당신의 의지를 일치시키는 것을 포기하고자 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기도 중에 메마름을 느낄지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도 성부의 계획에 동의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항상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간경 전례를 통하여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신비와 우리 자신을 연결하기를 바란다. 시간경을 바친다는 것은 고집과 뿌리 깊은 이기심의 표현인 우리의 자발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확신을 하여야겠다. 이와 같이 자신의 취향보다 마음으로 기도하고자 노력하는 이 좁은 문이야말로 새로운 삶인 부활로 이끄는 길이며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풍요롭고, 좀 더 보편적인 정신적 활동이라는 확신을 가져야겠다.

(코이노니아 제4집 16쪽)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글 
Jean Leclercq, O.S.B, 홍성임 돌로레스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파일첨부

1,75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