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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기도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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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7 ㅣ No.358

기도의 기술


어떤 사람이 자기는 더 이상 기도를 할 수가 없어서 선(禪)을 택했다고 할 때, 나는 늘 놀라곤 한다. 모든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기도의 형식이 선의 실천으로 해서 차츰 버려지고 있다. 선이나 요가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기도의 기술을 가르치는 수단들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어떤 경우에는 가능하겠지만, 역시 기도의 방식들은 그것이 동양식이든, 서양식이든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의 목적은 올바른 기도의 수단을 마련하고 준비하는 것이지 기도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도의 방식과 기도 자체 사이의 관계 규명은 핵심적 중요성을 지닌다.

나는 이 서론에서 그리스도교 기도에 있어 사용되던 전통적 수법을 다루고자 한다. 나는 때로 다른 수법들도 참고하겠지만, 오늘의 그리스도교인들의 것과 다른 전통들을 익혀 가는 것처럼, 그들의 기도에 고유한 방식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은 긴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 몇 년 사이에 우리는 그리스도교 기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목격했는데,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기도가 죽어 간다고 생각하거나 그것이 타에 자리를 양보할 것을 희망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현재의 현상을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쳐보는 몸부림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수명이 길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감고는 여명의 기미를 알아챌 수가 없는 법이다.

근래에 몇 개의 평론 잡지들이 기도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 편집자들은 확실히 그리스도교 기도가 죽을 날이 멀었다는 것을 확신할 필요가 없었다. 기도 없는 그리스도교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리스도교 기도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리스도는 박물관의 진열품으로 돌려져야 할 것이다.


1. 절대적 노력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기도는 둘 사이의 관계를 인간 측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배워야 할 행위이다. 인간은 숙련 없이는 무력하다. 인간성은 장인(匠人)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진보하기 위해서 기술을 이용한다. 우리는 사물들을 처리함으로서 인간적 능력이 성장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관계 안에서 성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도를 이용한다. 그러한 방법에 의해 우리는 이 관계의 현존에 도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깊게 한다. 기도 안에서 사용된 방법들은 예비적 성질의 것, 동기를 밝히기 위한 예비적 단계들이다. 그것들이 이 바라던 결과를 가져오는 한 기도를 위해 영혼을 준비시킨다. 그런 기도가 하느님께 향한 단순한 주의집중이든 그와의 깊은 일치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방법들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굳게 하기 위해 최상의 가능한 조건들을 만드는 데에 성공하면서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기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분심을 끝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피상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기도에 있어 사용하는 방법들의 모든 요점은 우리의 집중력을 모아서 기도의 기본적 요청에 즉 하느님과의 대화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데에 우리 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기도 방식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관상하거나 적어도 그의 현존을 염두에 두기 위한 자유를 선사한다.

우리를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이 기술들은 선과 많은 비그리스도교적 명상파들의 특징이다. 그것들은 인간과 피조물을 신적 정신의 표현들로 인정하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인 가치를 얻는다. 우리는 하느님을 그의 가시적이며 피조된 세상 너머로 가서만 발견하지 않는다. 보통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인간적인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찾고 발견한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리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 우리의 것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발견하려고 정밀한 여로를 기록해야 하는 기술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라는 것은 옳은 말이다. 기도는 나무가 죽을 것 같을 때에만 익는 것처럼, 기도의 방법이나 기술 다른 쪽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방법이 터놓을 때 기도가 일어난다. 물론 이것은 방법이 해야 할 기능을 다하고 그 안에서 구체화하고 실현된 기도에 알맞은 전조라야 함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만 모든 방법과 기술은 결국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 한계는 다른 어떤 것들을 위한 수단들이라는 정의대로 모든 방법에 붙어 다니는 것이다. 하나의 기도 기술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전적인 해방 안에 빨려 들어갈 때,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것은 하느님께 향한 영혼의 추진력의 일부가 되고, 그리고 그것이 완전하게 작동할 때는 그 모든 기술적 수단들을 하느님의 생명의 핵심에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 이용한다.

기도는 사랑처럼 배워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그렇게 많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한번도 기술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 나는 여기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어떻게 사랑을 만들에 내느냐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극히 서서해 배워야 할 어려운 기술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참된 사랑은 소위 “마음”이라고 하는 것뿐 아니라, 전인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설사 우리가 타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기도하려고 하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점차로 익숙해지는 매일의 노력이 요구된다. 항구한 노력에 의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최상의 것인 타인과 나의 통교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우리의 복잡한 인격을 수정하는 모든 것이 작동한다. 모든 기술들의 요점은 이 통교를 그 온갖 복잡성과 깊이 안에서 쉽게 하는 것이다. 회상과 집중이라는 수단들에 의해 그것들은 우리를 하느님 및 타인과 관련시킨다.


2. 기도 기술의 본질

그리스도교인들은 기도의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들의 놀라운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은 묵상, 정관, 공적 혹은 사적으로 외우는 표어적인 인용문과 기도문들, 성서 혹은 영적 저서들의 묵상적 독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단순하고 조용한 착실, 혹은 기도 중에 일어나는 생각과 감동을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성찬 미사에의 참여가 있다.

내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도에 있어서의 기술은 이중의 목적을 가진다. 하느님께 향해 정신을 집중하도록 하는 것과 우리 노력과 하느님의 주도권(이니시어티브)의 섬유로 기도라는 직물을 짜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이미 그 분을 기다리고 만나는 것이다. 채택된 방법이 사람을 하느님의 현존 안으로 인도하는 데에 성공할 때,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것은 세 단계에서 효력이 증명되었다. 즉 사람을 그의 분심에서 구출했고, 하느님의 신비에 그의 주의를 고정시켰고, 그리고 마지막 광경에서는 그 자체의 행동 범위를 넘어 신앙의 힘 안에 사람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이제 기도 기술의 본질은 그 자체를 소모시키는 이 과정에서 똑똑히 나타났다. 각 그리스도교 기도기술은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인간적 노력의 필요성과 그의 최종적 불충분성 양쪽에 대한 신념의 표현이다. 모든 그리스도교 기도기술은 이 확신의 기초 위에서 설명되고 정당화된다. 내가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면 나는 개인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과 또한 그러한 노력 없이 찾아지리라는 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하느님의 은총과 빛에 잠길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자마자 이 노력은 필요 없게 된다.

성공적인 기도 기술의 본질은 사람의 신뢰를 그 기술 자체에 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잘못 놓인 신뢰는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또한 하느님의 도움 없이 기술의 방편에 의해서만 내적 조명을 찾는 소승 불교의 승려들의 그것과 비길 수 있겠다. 아무리 완전하고 성공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도 그리스도교 기도기술들에 있어 그 본질적 가치는 언제나 같은 것이다. 즉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인간적 노력 깊은 곳에서 작용한다는 신념이다. 방법이 완전하게 되면 될 수록 그 모든 효과들은 하느님의 솔선에서 솟아나온다는 것이 더욱 명백하다. 인간은 가장 완전한 기술에 숙달하고 전적인 신앙으로 균형이 잡혀진 요구들을 자랑하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신뢰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놀라운 명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잘된 명상들을 위협하는 위험은 너무 순조롭게 작용하는 모든 조직들에 붙어 다니는 위험과 같은 것이다. 자기 보존에 몰두해서 그들은 비생산적이 된다. 우리는 단순히 정신 훈련에 종사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 이념 위에서 뒹구는 것을 즐길 수 있다. 만일 정신이 이 따위 오락에 잘못 인도되면, 그것으로서의 방법은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이다. 그 자체를 위한 장난으로 타락한 명상은 바람직한 신앙에로의 항구한 자극일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완고하게 정신을 세울 수 있는 그런 영적 공간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각 방법은 하느님께 대한 생각이나 혹은 적어도 그의 현존의 의식을 보유하기에 충분한 그릇과 같아야 한다. 그것은 제일 훌륭한 도공이 만든 상상할 수 있는 한의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이기에 넉넉한 입을 가진 크고 넓은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 표상을 묘사하기 위해 더 전진할 수 있다. 그릇을 만드는 자료 자체는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이기에 견딜 만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철두철미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든든한 도자기처럼 견고해야 하고 매우 조밀한 스펀지처럼 구멍이 많아야 한다. 이것이 완전한 방법이다. 인간적 노력 안에 또 그것을 통해 활동하시는 하느님, 내가 최선을 다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보이기 위해 하느님을 섬기는 인간.


3. 조화

기도에 있어서의 기술이나 방법의 참된 장점은 하고자 하는 것을 진행시키고 성취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초월적이고 우리의 저쪽에 계시지만, 우리는 인간 존재로서 우리의 인간적 체험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도와 기도할 수 있도록 채용된 방편들은 서로 밀접하게 작동한다. 기도의 방법들은 사람이 기도를 착수하려 할 때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한 가지 방법에만 고집하는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여러 가지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결국 모든 방법들은 기도하고자 하는 동일한 욕망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하느님의 신비들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자 원해서 그것들을 나의 생활의 의식적인 일부로 하고자 한다면, 나는 명상이라는 것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그의 아버지께 관한 것과 아버지와 그 자신의 관계를 계시한 것을 나는 받아들일 것이고, 이 계시가 나에게 어떤 의미와 연관이 있는지를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인식이 아버지의 인식과 동일한 것인지 하는 것 같은 외견상 모순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더 깊은 이해를 위한 이 추구에 완전히 말려들어 갈지라도, 기대하는 결말은 다소 지성적인 것 - 나의 인간적 지성의 한계 내에서의 하느님께 대한 좀 더 나은 인식이다. 자주 지적되는 바와 같이, 기억과 의지는 이 훈련과 지성에 봉사한다. 인간적 체험을 반성하는 어떤 시도와도 같이 차이는 있지만 하느님의 신비들을 생각할 때, 나는 나로 하여금 이 계시된 진리들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는 신적 조명을 위해서 준비하여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명상은 깊은 통찰력들을 마련할 수 있다. 처음에는 내가 그처럼 하느님의 신비들을 숙고하는데 있어 어떤 인간적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차츰 신앙이 나로 하여금 신비롭게 진리를 엿보도록 할 때, 단순히 그 진리를 용서하는 데에 관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관상이라고 하는 것의 시작이다.

관상의 형태에는 순수한 기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 있다. 그것은 신적 진리들 혹은 하느님 자신에게 생각과 느낌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물론 신앙이 작용하지만, 이 순진한 집중은 비교적 단순한 기술에 의해 도달할 수 있다. 나의 정신을 하나의 생각, 진리 혹은 사랑의 감정에 고정시키는 것으로 충분하고 또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잘 모를 정도로 그 안에 몰두하게 된다. 같은 방법으로 나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진리에 관한 혹은 그것을 나의 머리 안에 이러 저리 굴리는 것조차도 하지 않고, 다만 내가 사랑하는 어떤 분으로서의 하느님의 현존을 조용히 느끼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단순한 생각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이 우리에게 이해하라고 주는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그와 같은 노력이 우리 안에서의 하느님의 행위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동시에 확신하지 않는 한, 지각과 체험 안에서 더 이상의 탐구는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적 노력과 신적 솔선 사이에는 어떤 충돌도 없다는 법칙이다. 충돌이 없을 때, 기도는 순수한 관계가 된다. 마치 사랑이라는 것은 누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순수한 인격적 관계에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거기에는 자기 암시에로의 양보가 있을 수 없다. 관상은 그 완전한 의미와 특질을 하느님과의 이 관계 체험 안에서 얻는다.

선(禪) 혹은 요가가 그리스도교 기도기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지 꽤 오래 전부터 신체, 정신, 감각을 기도에 도움이 되는 상태로 집중시키는 방법들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기도를 시작하자 일어나는 어떤 평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규칙적으로 숨을 쉬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하느님, 예수의 이름이나 혹은 아주 짧은 화살기도를 입에 올린다. 차츰 깊고 순수한 평화, 영혼이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 안에서 쉼을 얻을 만큼 기쁘고도 청순한 평화가 그 사람의 전 존재를 감싼다.

서구 그리스도 교회에서 인기 있는 예수 기도는 그런 기도 방법 중의 하나다. 그 기도는 사람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염두에 두고 예수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도는 몸과 마음에 안정감을 가져오고, 심중에 그리스도의 정다운 현존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그런 깊은 평화의 상태로 이끈다. 그것은 중국의 아미타불과 일본 불교의 한 파인 “정토종”에서 끊임없이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교 기도다.

만일 우리는 그 자체 때문에 이 평화를 즐기는 데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아직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으로 이 평화를 당신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해석한다면, 비록 어떤 감정적 느낌을 나타내지 않더라도, 내가 말한 행복의 의식을 우리는 체험할 것이다. 이 평화에 잠길 때, 우리의 행운은 우리의 전 존재를 가득 채우는 하느님과의 일치일 것이다.

여기서 로사리오와 같이 동일한 기도들을 반복하는 데에 기초를 둔 방법들에 관해 몇 마디 해야겠다. 이 반복은 단조로운 기계적 절차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기도를 위한 본질적 전제 조건인 정신을 안정시키는 방편일 수 있다. 그것이 쉽다는 이유로 이 기도들은 때로 단순한 사람들의 기도로 불리고, 또한 순전히 기계적이 되지만 않는다면 자주 끊임없는 기도의 예배 행위일 수 있다.

화살기도들은 다른 기술에 속한다. 그것들은 사랑, 희망, 그리고 필요의 인식으로 고취되어서 하느님께 향한 중심으로부터의 외침 등이다. 그것들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피안의 하느님을 향해 밖으로 움직인다. 그것들은 신앙으로 움직여진 호소들로서 윤허되었다는 확신 안에서 신뢰를 준다.


4. 내 몸으로

내가 지금 이야기한 내적 조화는 실제로 우리의 전 인간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정신으로만 기도하지 않는다. 나는 영신적 존재로서만 하느님과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은 그런 존재로서 나를 점유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순수한 신비적 체험에 있어서까지도 하느님의 활동이 육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나의 온전한 자아가 그 체험에 휩쓸려 들어간다. 만일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할 때, 육체는 나무토막처럼 되어 가는 것, 이것은 육체가 간단히 한쪽으로 밀려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전 인간 존재를 완전한 수동 상태로 내버려두는 신체험에 참여하는 길이다. 영혼과 육신이 그토록 풀 수 없을 만큼 결합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렇게까지 영향을 받지 않고도 하느님과의 일치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육체는 영혼이 하는 것과 같은 강도로 하느님을 체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나무토막같이 비활동적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전 자아로 기도한다. 그리고 나의 육체도 나의 영혼의 체험에 참여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기도에 있어 육체를 의식적으로 고려하는 이유이다. 영적 체험과 육체적 자세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수가 자주 있다. 나는 갑자기 그리고 깊게 그러면서도 나의 육체와 그 감각들이 지금 일어나는 일에 겨우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은 그런 순수한 영적 상태에서 하느님한테 사로잡힐 수 있다. 갑자기 하느님의 빛과 은총이 나의 영혼에 흘러 들어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전부다. 내 옆에 있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의 오판과 지각과 정신 집중은 전적으로 이 하느님께 대한 인식 안에 흡수되어 있다. 남들은 이 영적 체험으로 완전히 넋을 잃은 내 존재의 외적 징후로서 순간적으로 움찔거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보통으로 영육은 서로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영혼이 꽤 독립적일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영적으로 진보한 사람들은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돌리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기도 안에 그들의 육체를 포함시키기를 늘 힘써 왔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께 향한 움직임을 용이하게 하는 육체의 자세를 결정하는 것은 영혼이다. 영혼이 하느님한테 이끌림을 느낄 때, 육체의 도움을 청한다. “가서 조용한 구석을 찾아라. 앉아 있거나 혹은 무릎을 꿇어라. 원한다면 천천히 걸어 다녀라. 실제로 네가 알맞게 평온을 얻고 네가 가서 하느님을 찾을 때까지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필요한 침묵을 보증하기 위해서 조용한 장소는 불가결의 것이다. 우리 주님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방 혹은 성당 한 구석, 평온한 환경들은 모든 기도 방법에 있어 기초적인 것이다. 성 이냐시오는 특히 그런 환경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죄에 대한 묵상은 그렇게 밝지 않은 곳에서 가장 잘 되고, 부활을 주제로 하는 묵상은 밝은 빛을 요구한다. 장소와 분위기의 선택은 명상에 기초적인 것이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도로 유도하는 최상의 자세를 발견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통으로 꿇어서 하는 기도가 기도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해서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앉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다분히 기도와 극기를 혼동하는 것인데 둘은 절대로 같은 것이 아니다.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는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종속의 태도를 나타내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무릎을 꿇음은 특히 팔을 어디에 의지하지 않고 그냥 늘어뜨린다면, 정신의 산만을 억제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전적인 느슨함과 수용의 자세 안에서, 영혼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맞이하는 평온을 얻을 수 있다. 앉아 있는 것도 주님과의 정다운 만남을 위한 예비 행위로서 육체적 및 정신적 평온을 일으키고 또한 몸의 자세로서 영혼과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나타낸다.

태고적부터 요가와 선은 같은 원리들에 기초를 둔 보다 더 단순한 방법들을 낳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느슨함의 감정과 내적 평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호흡을 조절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이것은 신비적 체험의 첫 자극들을 느끼는 사람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이 된다. 누가 “정관”이라는 것에 들어갈 때, 그는 깊은 내적 평온의 상태에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는 내적으로 현존을 알아차리는 듯하고 또 이 현존에 전적으로 집중되기를 원한다. 심장은 느리게 고동치고 호흡은 대체로 스스로 조절할 정도로 이 평온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요가에 있어서는 자제와 정신의 안정 때문에 고의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는데 반해, 이 경우에 규칙적인 호흡은 내적 현존의 실현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전자의 평온은 “정관”의 경우처럼 영신적 통찰의 결과도 아니고, 필연적으로 그것으로 유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요가와 그와 비슷한 방법들은 우리가 기도할 때, 얼마나 많이 우리 육체가 관련되는 지를 그대로 잘 예증한다.


5. 방법의 한계와 불충분성

영혼의 하느님을 찾는 동안 고요함을 보존하는 것이 육체와 그의 감각들에게 요구되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들은 영혼이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을 도울 뿐 아니라, 하느님의 발견과 체험이 인간 체험의 전체성 안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불가결의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의 방법들이 단지 극적이고 자동적인 결과들을 내는 요술쟁이의 속임수처럼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모든 방법들의 위험이 숨어 있다. 편하게 되기를, 신비적 현존으로 평온, 안도 및 친밀의 감정을 가져오도록 강요당해서, 당신은 그것이 기도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이라고 믿도록 오도될 수 있다. 방법을 매우 중요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상 더 전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상급을 이미 받았다. 만일 내적 평온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라면, 그러한 평온은 내가 평온을 얻는 기술로도 얻는 것들이고 또는 환각제라도 비교적 싸게 마련해 줄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내적 행복감의 온기를 느끼고, 예외적 진리들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형언할 수 없는 평화를 맛볼 수 있다. 또 그 위에 감정적인 고요함과 인간 두뇌의 통찰들까지 여기에 합세해서 생각지도 못한 정신적 능력이 갑자기 생길 수 있다. 감정적 균형과 정신적 지각의 분야에는 거의 무엇이나 가능하다. 실제로는 환상밖에 안 되는 종교적 체험으로 착각케 하는 방법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는 힘써야 하겠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실제로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평온, 균형, 자기 집중, 개성 통합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소위 동양적 명상 방법들의 유행이 설명한다. 그것들은 하느님 편에서의 어떤 개입도 배제하기 때문에, 그 기술적 완전성의 수준까지 밀고 간다. 만일 한 방법이 어떠한 위격적 만남도 기대함이 없이 일관해서 신뢰를 받으면, 그것은 완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취급될 수 있다. 선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선은 방법으로서 자체를 해소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도의 가치 있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이 성공적일수록, 덜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은 방법의 자격을 빼앗는 하나의 방법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활동적”인 것에서 “수동적”인 것이 된다. 만일 그것이 처음에는 일종의 활동성으로 작용한다면, 끝에 가서 우세한 것은 비활동성이다.

모든 훌륭한 방법들은 능동에서 수동에로의 이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여기서 나는 부처님의 근본적 체험을 생각해 내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는 수 년 동안 극도로 엄격한 파라몬의 방법들로 깨우침을 찾았다. 그는 이 기술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충분히 노력했다. 그러나 신비는 닫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을 팽개치고 가서 한 나무 아래 앉았다. 완전히 느슨해졌을 때, 그는 가장 절실히 느낀 그의 인간적 체험을 의식적 수평에 떠오르게 했고, 이것이 그에게는 깨달음이었다. 인간적 비참과 그 이유에 대한 강렬한 직관적 통찰, 부처님은 자신의 가장 확실한 자아출현(진여)을 이룩했고 그의 가장 내밀한 이 존재가 그에게 말을 했다. 비록 이것이 엄밀한 뜻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은 아니었지만 본래 비상한 무엇이었다. 같은 본보기를 선 안에서도 볼 수 있다. 고도의 활동인데도 불구하고 온전한 수동성 안에서 그 성취에 도달하는 방법.

이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만남, 교환, 일치의 체험인 그리스도교 기도에 관해서는 더욱 올바른 것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기도 방법에 의해 하느님을 찾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최고의 행복과 접해 있는 평온에로 들어가는데 성공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내적 신비에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줄이고 개방과 순종의 정신으로 경청하게 된다. 사랑이라고 하는 최상의 방법은 타인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신뢰하는 친근감으로 우리에게 접근해서 우리의 마음을 점유하도록 작용한다.

기도 기술이 관계하는 곳에서는 이것을 쉽게 잃어버린다. 기술의 목적은 만남을 위한 준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일치 자체 안에 있다. 만남의 지점에 도달했을 때, 방법들은 아직도 사용될 수 있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침묵이 아직도 지켜질 수 있다. 그러나 체험 자체는 실제로 기술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밝아 오는 빛에 자체를 느끼게 하는 현존에 민감하게 되는 문제다. 기술이란 우리의 노력을 하느님의 활동과 현존에 투입하려는 준비 태세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느님의 활동과 현존이 명백해지면 우리 안에서는 신적 활동에 대한 지각이 생겨서, 강생한 말씀과 같이,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러나 하느님의 힘과 권능 안에서 산다. 우리의 인간적 기도에 있어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우리는 무한히 더 유효한 하느님의 비밀 안에 우리의 노력이 흡수되도록 한다.

만일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노력의 시초에 모든 기술과 방법들이 신앙에 자리를 양보하게끔 한다면, 그때 우리는 신앙에 불리하지 않는 어떤 방법도 채용할 수 있다. 그래서 선이나 요가 같은 타종교의 문화의 아주 익숙한 방법들에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도의 방법들에 대한 관심의 부흥은 우리 시대의 하나의 현상이다. 아마 이것은 세속화된 종교의 과장된 경향들에 대한 반발과 인간의 현재의 발전을 자세히 검토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인간은 그의 참된 신원(자기 동일성)을 재발견하고 있다. 인간은 단지 인간이라는 것을 벗어나, “인간은 인간을 초월한다”는 파스칼의 직관적 인식을 거의 매일 확인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기도의 기술에 실패하면, 그것은 그릇된 방법들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비난받는 그 방법들이 아니라, 그들의 왜곡된 적용 때문이다. 아무런 종교적 자극도 없는 선이나 요가의 실천은 전통적 명상 혹은 조용한 관상 이외에는 어떤 지속적인 영적 결과를 냄직하지 않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방법들을 힘으로 믿는 것은 허황된 일이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그리고 자고로 모든 인간적 기교를 넘어서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들 안에 활동하시도록 할 각오가 되어 있는 탐구자들만이 하느님을 발견한다.

(코이노니아 제3집 30쪽)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글 
I. Raguin, 황춘흥 다미아노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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