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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성독지남: 지금 여기로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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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4 ㅣ No.353

[聖讀指南] 지금 여기로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


그리스도교 수도승 생활의 정수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에 대해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고대의 한 수도 교부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였다: “예언자들은 책을 썼고 교부들은 그것을 실천했으며, 그 다음 세대는 그것을 마음으로 배웠다. 그러나 우리의 세대는(400년대) 그것을 필사한 후에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창문 옆 의자에 놓아둔다.”(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무명 228). 이것은 한 원로가 그 당시의 수도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수행을 게을리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지적했던 말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이러한 원로의 지적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말씀을 잘 필사하지도 않을뿐더러, 더욱이 창문 옆 의자에 놓아두지도 않고 오히려 책장 깊숙이 먼지가 쌓이도록 말씀을 방치해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복잡하고 시끄러운 이 세상 한가운데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길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물음은 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화두와 같은 질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참된 제자됨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 그분을 온전히 따라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분을 잘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만 한다. 사실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기에 우리의 삶은 자주 메마르게 되고, 또한 쉽게 감각주의나 감상주의 혹은 열광주의에 떨어지게 된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생활이란 우리 신앙의 최고 규범인 하느님 말씀과의 깊은 친교 안에서 그분을 철저히 따라가고자 하는 삶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하느님 말씀인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으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참된 영적인 힘과 생명력을 얻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라가야 함을 강조하였다(계시헌장 21항). 수도승이자 성경학자로서 우리에게 라틴어(불가타) 성경을 전해준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결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라고 단언하였다. 이 말은 교회의 여러 문헌들 안에서 자주 반복되어 인용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수 없고 또한 그분을 제대로 따라 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우리의 영성생활은 철저히 하느님 말씀 안에 뿌리를 박고 그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의 샘터인 말씀에로 나아감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항구히 읽고 묵상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말씀을 죽은 문자 속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진실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모독이며 경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단순하고 항구한 말씀 수행을 통해서 말씀을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과 일상의 삶 안으로 가져와야 하고, 동시에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때 하느님의 말씀은 더 이상 과거라는 혹은 문자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 현재 우리의 구체적인 삶으로 새롭게 다가오게 된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현재화, 강생화, 인격화 그리고 내면화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현재화하셨는지 살펴볼 수 있는데, 특별히 루카 복음의 예는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깨닫게 한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시어 성경을 읽기 위해서 시중드는 자에게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이사야서를 찾아 봉독하셨다. 그리고 다시 두루마리를 시중드는 자에게 돌려주고 당신 자리에 와서 앉으시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그분에게로 쏠리게 되었다. 아마도 이 순간은 예수님 자신에게도 매우 결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그분께서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시며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한 말씀을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즉 예수님은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말씀을 당신이 지금 머무시는 그곳, 그 시간으로 가져오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 옛날 예언자들이나 혹은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구체적인 ‘이곳’ 그리고 ‘지금’ 이 시간으로(Hic et Nunc) 끊임없이 가져와야 한다. 그래야 말씀은 더 이상 과거라는 무덤에 갇히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와 지금 여기에 살아 현존하게 된다.

사실 성독 수행을 충실히 하다보면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한 말씀이 강하게 우리의 존재 깊은 곳으로부터 다가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말씀의 깊은 영적 의미들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혹은 그 말씀이 우리 내면 깊숙이 다가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려 그 옛날 사막 교부들이 체험했듯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불타는 기도로 넘어가 충만한 뜨거움과 통회의 눈물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로써 그 말씀은 2000년 전의 죽은 말씀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주님께서 몸소 우리 각자에게 선포하시는 구체적인 말씀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러한 말씀 수행을 오래하다 보면 어느덧 말씀과 인격적인 만남도 가능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영성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일상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살아감도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말씀을 우리가 거하는 지금 그리고 이곳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간직하고 일상 안에서 항구히 말씀 수행을 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글 서두에 인용했던 한 사막교부의 지적이 또 다른 울림이 되어 오늘 우리의 미지근한 마음과 나태한 말씀 수행에 자극을 주고 있다. 끝으로 예로니모 성인의 아름다운 말을 인용하면서 이번 호를 마친다.

“성경을 사랑하라,
그러면 지혜가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라,
그러면 지혜는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다.”

[분도, 2010년 가을호,
글 · 사진제공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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