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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의 대가들: 샤를르 드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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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09 ㅣ No.346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샤를르 드 푸꼬 (1)


「사막의 은수자」또는 「사막의 선교사」라 불리는 샤를르 드 푸꼬는 사하라에서 나자렛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따르 고자 하였다. 「은수자」와 「선교사」는 동시에 양립하기 어려운 성소 및 생활상태로 여겨지지만 푸꼬의 특수한 삶의 경우엔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사막의 오지(奧地)에서 은거하였지만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도적 봉사와 증거의 삶을 살았고,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였지만 철저한 관상적 기도를 동반하였다. 그는 종교와 문화가 다른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같은 노동자로 있으면서 「만민의 형제」로 사는 것이 그의 성소이며 사도직이라 확신했다.


생애

샤를르 드 푸꼬는 1858년 9월 18일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을 성실히 수행하던 한 귀족 가정에 태어났다. 그는 불행히도 여섯 살 때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한 친척 으로부터 보호받던 그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기숙사에 보내져 공부하며 청소년기를 지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학업에 성실치 않아 성적이 부진했고 엄격한 규율 준수를 요구하는 기숙사 생활을 싫어해 어느 날 그곳에서 도주했다. 그는 퇴학과 동시에 신심생활도 멀리했고 결국 신앙을 잃었다.

그는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장교로 임관되었다. 그러나 규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방종한 활을 하다가 결국 나쁜 행실이 드러나 1881년 휴직처분을 받게 되었다. 1883년 동료 들이 북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푸꼬는 군에 재 입대하여 그들과 합류했다.

전쟁이 끝난 후 지리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아프리카에 남아 탐험대의 일원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 탐험에서 흥미 있는 것들을 많이 발견했는데, 특히 학문적으로 유익한 지도 작성법, 측량법 등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그에 대해 상세한 연구 보고서를 작성했고 나중엔 이 분야에 대해서 유력한 잡지를 발간함으로써 유명해졌다.

파리의 지질학 연구원에서는 푸꼬의 공훈을 치하하는 황금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학문 연구에 열중하면서 더 이상 옛날의 경박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탐험 중 그는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하며 살아가는 회교도들이 있음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사막의 광활하고 신비로운 장관에서 그는 무엇인가 숭배하고 싶은 내적 충동을 강렬히 느꼈다.

이러한 체험들은 그가 기숙사를 떠난 후 처음으로 다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삶을 변혁시킬만한 심경변화를 겪게 되었다. 파리에 돌아 온 그는 내적 움직임에 이끌려 자주 성당에 갔으며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간절한 기도를 반복해서 바쳤다. 『하느님, 만일 당신이 계시다면 저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어느 날 사촌누이로부터 소개받은 위블랭 신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신부는 일생동안 영적 대화를 통해 큰 도움을 주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토론할 마음으로 그 신부를 찾아갔던 푸꼬는 그것을 용납 하지 않고 위압적으로 내린 그의 명령에 따라 고해성사를 보았고 성체를 모셨다. 이 때가 12년간 신앙을 떠나 방황하다가 돌아온 1886년,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였다.

일생을 바쳐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푸꼬는 위블랭 신부의 권유에 따라 우선 성지 순례를 하게 되었는데 나자렛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예수님이 알려지지 않은 마을에서 가난하고 겸손한 목수로서 숨어 사셨다는 것이 그의 뇌리에 깊이 새겨 졌고 거기서 그분을 본받고자 하는 강한 원의와 함께 성소의 싹이 트게되었다.

성지 순례에서 돌아 온 푸꼬는 1890년 1월 16일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처음엔 그곳에서 평화를 누렸으나 점차로 그의 내면에서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는 나자렛의 생활에 대한 열망을 느끼며 수년간 내적 갈등을 겪은 후 결국 장상의 허락으로 그 곳을 떠나 나자렛으로 갔다.

그는 작은 판자집에 기거하면서 글라라 수녀원의 잡역부로 3년간 정원을 돌보고 잔심부름을 하였고 그 외의 시간엔 성체 앞에서 기도와 복음묵상에 열중했다. 푸꼬는 그곳의 원장 수녀와 위블랭 신부의 권유에 동의하여 오랜 동안 망설여 오던 사제의 길로 나아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전에 살던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1901년 6월 9일 43세의 푸꼬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그는 모로코 근처에 있는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 베니아베스로 떠났다. 그는 처음엔 그곳에서 봉쇄생활을 하며 나자렛의 삶 그대로를 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 군인들과 가난한 모슬렘 토착민들의 영적 요구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그는 봉쇄생활의 계획을 바꾸어 '만민의 형제' 가 되는 길이 주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바람에 응답하고자 하는 열의, 예수님께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열정은 푸꼬로 하여금 여러 가지 활동을 하게 했다.

푸꼬는 이슬람교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 가운데 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모시고 가는 일』이라고 확신하며 이 성체의 현존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는 수도 가족을 창립하는 것을 허락 받았다. 그는 또한 성심의 작은 자매회 창립도 구상했다.

1903년 1월부터 그는 아직 어느 사제도 간 적 없는 사하라 사막의 중심 산악지대 호가르의 뚜아래그 지방의 복음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1904년 여러 달 동안 호가르 지역을 순회하였고 테마세크어를 공부하여 그 언어로 복음서를 번역했다.

1905년 8월 13일 타만라셋에 도착한 푸꼬는 1916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곳의 원주민들을 위해 활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벗이 되었다. 그의 소명은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있기 위해서 그는 오랜 동안 미사도, 성체도 없이 지내야 했다.

그는 2년 동안 타만라셋에 체재한 후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조금씩 나를 신뢰해 주었습니다』. 그는 투아래그 사람들이 『저 사람은 우리말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할만큼 그들의 말을 배웠으며 투아래그 용어 사전 만드는 일에 또한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그는 함께 일할 동료들을 얻기 위하여 여러 곳에 편지를 썼고 친구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해를 기다려야 했고 그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작은 형제회와 작은 자매회가 창립되기까지는 많은 기도와 희생을 바치면서 성화되고 목숨마저 바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불모의 땅이 신앙의 풍요로운 땅이 되기 위해선 날마다 새로운 예수님의 피, 자신의 피가 요청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1897년 6월 6일 나자렛에서 이렇게 썼다. 『너(푸꼬 자신)는 순교자로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알몸이 되어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것이 오늘이기를 소망하라』.

1916년 12월 1일 오후 7시 경 그는 세누시스트 일당에 의해 은둔소 밖으로 끌려나와 결박을 당하고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침묵 지키며 기도하고 있던 푸꼬를 15세 소년에게 총을 주며 감시하도록 하고 은둔소를 약탈하러 갔다. 그 사이에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두 명의 낙타병이 경보를 울리며 달려 왔는데 그 소리에 놀랜 소년은 푸꼬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날 아침 쓴 한 편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들의 무화(無化), 자기 부정은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시키는 영혼에 선을 행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가톨릭신문, 2000년 12월 17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샤를르 드 푸꼬 (2)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1) 샤를르 드 푸꼬는 복음성서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 정신 뿐 아니라 실제적 측면에서까지 철저히 닮고 본받으려 하였다.

그가 강조한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란 사람이 되신 느님, 예수 그리스도께 동일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히 관상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존재를 닮아 결국 사랑 받는 존재와 하나로 융화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처럼, 그분과 더불어, 그분을 위해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대화의 형식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의 규칙은 나를 따르는 것이다. 너는 내가 행했을 것을 실천하라. 매사에서 이렇게 스스로 물어라. 「우리 주님께서는 이 같은 경우에 어떻게 행하셨을가? 그리고 그 결론을 실천에 옮겨라. 이것이 너에게 유일하고 절대적인 규칙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2) 푸꼬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을 중요시하며 생활화하였다.

그는 성서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잘 인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살았지만, 성찬의 식탁에서 뿐 아니라 말씀의 식탁에서 영적 양식 섭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성서의 말씀을 적으면서 묵상했으며 특히 복음서의 묵상을 소중히 여겼다. 그가 초안한 규칙서를 보면 성서를 형제들의 집단 성당 감실 옆에 언제나 현시할 것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요약을 늘 품에 간직하고 다녔다.

3) 푸꼬는 늘 「꼴지의 자리」를 선택하면서 지나칠 만큼 엄격한 수덕생활을 했지만 수덕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며 실천하였다.

푸꼬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 안에서 성성은 사랑의 완성이고 사랑이 하느님께 일치하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 안에 포함시킨다. 그가 십자가에 나타난 가난, 굴욕, 천대받음 등 고행 수덕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본받기 위해서였다. 그의 글들 안에서 고행들을 그 자체로 찬양하는 것은 한 구절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을 악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최상의 가치로 부여하셨기에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성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에 인간은 응답해야 한다. 즉 성성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지만 인간 편의 협조가 요청되는 것이다. 인간의 협조란 성화시켜 주시는 성령께 개방하며 순응하는 자세이다. 여기에 수덕이 필수 조건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봉헌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기적인 자신의 뜻으로부터 떠나는 부단한 노고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같이 뒷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재확인 될, 수덕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푸꼬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4) 푸꼬는 새로운 선교방법에 빛을 주었다.

가그 베니아베스에 있을 때에는 몇 명의 노예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주기도 했지만 그는 전통적 선교사의 사도직에 부르심을 받지 않았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는 회교도들에게 복음을 심어 주려면 먼저 그들과 우정을 맺어야 하고 생활의 증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침묵 중에 드러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와 같은 사도직을 「선량함의 사도직」이라 했다.

푸꼬는 그들과 더욱 친밀히 사귀기 위해 의복, 음식, 생활 방식까지도 그들의 것을 따르려 했으며 그들의 언어, 역사, 전통, 민속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문화와 상황을 파악하면서 끊임없이 토착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말로써가 아니라 생활로써 복음선포를 수행했다. 실로 그는 회교도들과 친해지는 방법, 그들의 편견적 태도를 애덕으로 극복하는 법,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을 축복하게 하여 그들을 조금씩 그 진리로 인도하는 방법을 이론이나 실제에 있어서 체험으로 터득한 최고의 권위자이다.

5) 푸꼬의 수도회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결실을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수도원의 설립자들을 생존시에 이미 여러 수도원들을 세워 다수의 회원들을 확보했던 데 비해 푸꼬는 그의 생존시에 한 사람의 회원도 얻을 수 없었다. 그는「작은 형제회」와 「작은 자매회」창립을 준비하면서 동료들을 얻기 위하여 기도중에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엿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의 자세는 바뀌었다. 기도화 희생, 목숨까지 바치면서 하느님의 때를 기다려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한 그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 온 한 구절의 성서말씀이 있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며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푸꼬는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은 하나의 밀알이었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예수 성심의 작은 자매회」가 1933년 설립되었고 1939년에 예수의 작은 자매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푸꼬의 정신을 따르는 많은 형제, 자매들이 재속회를 이루었다. 한국에도 1955년에 예수의 작은 자매회가, 1969년에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가 들어왔다. 1984년엔 평신도 재속회가 설립되어 그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6) 푸꼬의 수도회의 정신과 사명은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여러 상황의 선교 지역에서 성체를 지속적으로 흠숭하며 성체성사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서술한다. 『제대와 감실을 불신자들 가운데로 가지고 가서 예수께서 30년간 조용히 나자렛에서 세상을 성화시키셨듯이 우리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저들을 성화시킨다.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 즉 거룩한 제물로 희생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모시고 감으로써, 최선을 다 해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성심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가지고 감으로써 그 일을 효과적으로 행한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전하는 직분에로 불리지 않았으니 그냥 조용히 찬미하고 선교한다』.

푸꼬는 선교활동을 장려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 인도하고자 한 이들 가운데 함께 머물러 있는 소명일 뿐이다. 새로운 형식의 관상 기도가 도입되었는데 이것은 세속에서 사는 관상 생활로서 침묵의 수단으로 「함께 있음」을 의사 소통 방법으로 삼는다. 이를 통해 작은 형제, 자매 회원들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빈곤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가난을 형제애의 증거로 삼는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복음서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그들의 사도직이다.

7) 푸꼬는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본받는 「복음적 실재론」으로서 그의 삶과 영적 메시지는 오늘 구체적인 영성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 등 영성의 대가들의 저서를 깊이 탐구하고 영향을 받아 거기서 발견한 교리나 조언을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려고 애썼다. 그가 교의적 측면에서 새로이 공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학문적으로 충분히 고려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인간 예수 그리그도를 깊이 깨닫고 발견했다. 그의 내면 세계에서 체험된 「숨어사시던 나자렛 예수님」에 대한 발견은 학문적 분야에서 보다 일상적 생활에서 더욱 풍요로운 영적 결실을 맺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가톨릭신문, 2001년 1월 21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샤를르 드 푸꼬 (3)


영성

푸꼬의 영성은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을 고백한 「위탁의 기도」에 잘 요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에 이루어진다면 이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 하여 하느님께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

푸꼬는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 대해 묵상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그 사랑을 주는 대상과 닮고자 하는 열망보다 더 큰 갈증이 있겠는가!』

그는 회심의 순간부터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몰입되었으며 그에게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처럼,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1) 예수님처럼 살다

푸꼬는 예수님과의 대화체로 그의 삶의 규범을 이렇게 기록한다. 『너의 규칙은 나를 따르는 것이다. 너는 내가 행했을 것을 실행하라. 매사에서 이렇게 스스로 물어라. 「우리 주님께서 이 같은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그리고 그 결론을 실천에 옮겨라. 이것이 네게 유일하고 절대적인 규칙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푸꼬는 복음적 권고를 실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며 예수 그리스도를 가능한 한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 본받고자 갈망했다. 그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세 양태로 구분한다. 하나는 사람들과 함께 사시던 나자렛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은거하여 성부와 대화하시며 사시던 사막의 생활이며 마지막 하나는 복음을 선포하신 공생활이다. 푸꼬는 예수님의 세 생활 양태 중 특별히 나자렛의 성 가정의 드러나지 않는 가난한 생활을 자신이 본받아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에서 세 양태의 삶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필요했듯이 푸꼬에게도 단계적으로 그분의 삶을 따르게 되었다.

푸꼬는 나자렛에서 베니아베스와 그리고 타만라셋에서 그 지방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생활 조건을 자신의 생활 기준으로 삼았다. 예수님이 꼴찌의 인간들과 같은 생활을 나누셨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의 가난, 굴욕, 천대받음을 힘껏 본받고자 했던 이유도 그분을 참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을 모시고 살다.

푸꼬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사시던 성지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특별한 은총이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떠나 다시 성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현존은 성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그분이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야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복음이 한 번도 선포된 적 없는 먼 나라들에도 가야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자 하는 푸꼬의 영성은 성체성사와 성서 그리고 이웃 형제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에서 잘 나타난다.

성체께 대한 경배는 푸꼬의 영성 생활의 핵심을 이룬다. 그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대해 그가 마치 함께 오래 생활했던 사람을 대하듯이 표현하고 처신하였다. 성체께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그의 글 도처에서 엿볼 수 있다.

푸꼬는 하느님 말씀인 성서에 대해 성체 성사 못지 않은 영적 자세를 취하였다. 푸꼬는 전 생애에 걸쳐 성서의 말씀, 특히 복음말씀을 적어가면서 묵상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그분의 삶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에 의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단순하고 실질적인 성서 묵상 방법을 소개하였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다. 이어서 그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실행 하셨을지 추론한다. 셋째 단계에서 자신은 그 말씀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할 것인지를 묵상한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기도)로 끝맺는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5, 40). 푸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였다.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바로 이 말씀이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변화시킬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를 사로잡았다고 표현한 적 있다. 그리고 그는 이웃 사랑을 성체성사와 연결짓는다. 트라피스트 수도원과 나자렛에서 지낸 여러 해의 관상생활은 그를 그리스도와 긴밀히 일치하도록 했으며 그것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활동 중에도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와 더욱 일치하면서 사하라 사막에서 이웃을 위한 인정 넘치는 사랑을 실천하게 했다.


2. 순교의 삶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록들과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의하면 순교는 무엇보다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절정이다. 이 진리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재천명하였다. 예수님을 철저히 모방하고 싶어하던 푸꼬는 당연히 순교를 염원하였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주님,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저의 목숨을 주님 위해 바치나이다. 주님께 저의 생명을 송두리째 바치나이다』

그는 순교란 인간적 열의나 영웅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허락하실 때 받을 수 있는 은총임을 잘 알았기에 그것을 간절히 청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받기 위한 협력으로 매일의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함을 깨달았다. 『너는 순교자로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알몸이 되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것이 오늘이기를 소망하라. 네가 이 무한한 은총을 바랄 수 있도록 충실하게 깨어서 십자가를 지라』


푸꼬는 과연 순교자인가?

그는 신앙 때문에 어떤 뚜렷한 박해자로부터 처형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일반적인 순교자들처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증언하며 장렬히 목숨을 바친 순교 장면을 표출하지도 못 하였다. 약탈자 무리 중 한 소년의 실수로 어이없이 희생된 실패로 끝난 죽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미래를 예감한 듯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죽음에 대해) 실망했다면 성 바오로와 성 베드로가 순교한 그 날 저녁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어찌 실망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언제나 겉보기에는 실패한 듯이 보이나 그 안에 십자가의 실질적인 승리가 있다』

순교자들은 기도와 사랑 안에서 일치된 복음적 일상을 살았던 분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살았고 그분을 위해 근본적 결단을 내리며 그분에게 모든 것을 바칠 용의 중에 살았던 것이다. 극도의 시련인 죽음은 다만 순교자들의 그러한 삶을 세상에 밝혔을 뿐이다. 회교도들 사이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지냈던 푸꼬는 언제나 간접적 박해를 받았고 목숨의 위험에 놓인 채 살았으며 매일 매 순간 하느님께 목숨을 바칠 용의 중에 매일의 순교의 삶을 살았다. 그의 유품 수첩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너는 오늘 순교자로 죽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살아라』

푸꼬는 죽을 때 순교자로 인정받을 만한 외적 상황과 격식 중에 있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철저히 순교자적 삶을 살았던 그는 진정한 순교자적 자세로 죽음에 임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가톨릭신문, 2001년 2월 4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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