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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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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09 ㅣ No.345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1)


성 요한 보스코(1815~1888)는 「예방 교육」이라는 청소년 교육방법을 개발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청소년들 사목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개선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그의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성, 종교, 사랑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교육의 기반으로 삼았다.

요한 보스코는 당시보다 더욱 혼란스런 상황에 살고있는 오늘의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과 사목에 여전히 많은 것을 제시하고 시사하는 길잡이이며 언제나 그 정신과 자세에 있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1. 생애

요한 보스코(흔히 돈 보스코라 불란다. 「돈」은 사제에게 붙이는 존칭이므로 보스코 신부님이라는 뜻이다)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처의 작은 마을베티에서 농부였던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한 보스코는 아버지를 겨우 두 살 때 여의었고 훌륭한 신앙심과 고결한 정신을 지닌 어머니로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요한은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거들고 있엇지만 언제나 공부하고 싶은 소망을 버릴 수 없었다. 9살 되던 해 그는 일생동안 머리에서 지울 수 없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것을 자신의 미래의 사명을 예시한 중요한 꿈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 남자와 그의 모친인 고귀한 부인이 나타나 요한이 장차 수행해야 할 과제를 알려주는 꿈이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 꿈을 꾼 이후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1830년 15세의 요한은 마을 본당에 새로 부임한 칼로쏘 신부한테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얼마 안되어 그 신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계속 공부하고 싶었던 요한은 집에서 20리 가량 떨어진 카스텔 누오보 학교에 다녔다. 다름해 그는 키에리에 있는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명석한 두뇌와 열성적 노력으로 그의 성적은 우수했다. 그는 또한 라틴어, 이탈리아어 문학서적들을 즐겨 탐독했고 놀이와 오락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는 가수, 배우, 즉흥시인, 마술사 등으로 불렸을 정도로 다재다능했고, 학생들의 대장 역할을 할 만큼 지도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강론이나 교리시간에 들은 얘기나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주어 재담꾼으로 통하며 인기가 좋았다. 그는 장터에서 곡예사나 광대들의 공연을 예리한 눈썰미로 보고 흉내내며 익힌 재치있는 곡예, 줄타기, 마술 등으로 마을 사람들을 매우 즐겁게 해 주었다. 그가 공연 전에 관중에게 대가(代價)로 요구한 것은 묵주기도와 함께 성가를 부르고 때론 본당신부한테서 들었던 강론 한 토막을 상기시키며 듣도록 하는 것이었다.

중등학교 4년 동안 공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고자 그는 여러가지 일을 해야했다. 그는 가정교사, 대장장이, 제화공 그리고 목수로도 일을 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훗날 직업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유망한 기술을 습득시켜 급속히 산업화되어 가는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데 소중한 밑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여러가지 직업들을 두루 경험한 덕분에 그는 청소년들의 어려움과 문제점들을 깊이 이해하면서 그들을 대하고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1836년에 요한 보스코는 키에리 대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사제직을 준비하면서 5년간 공부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 뿐 아니라 외국어들을 습득했고 고전작품들을 읽으면서 폭넓은 교양을 쌓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강론, 교리 강의 등을 위한 사목 자료들을 수집했고 틈틈이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노래와 놀이 등으로 오락시간을 마련해 주었으며 학교공부를 도왔고 교리를 가르쳐 첫 영성체를 준비시켰다.

그는 얼마동안 몬탈도 예수회 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며 희랍어를 가르치면서 예수회의 교육방법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실습중 그는 자신이 상류층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부름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한 소명을 절실히 느꼈다.

1841년 6월 5일 요한 보스코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영적 지도자 카파소 신부의 조언에 따라 3년 동안 콘비토 신학교에서 사제학교를 수료하였다. 거기서 그는 정규과목 이수 외에 병원과 감옥 방문, 주변 본당의 사목지원 및 청소년들의 교리교육 등 부지런히 사도적 활동을 수행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사제 성품을 받던 해 12월에 한 성당의 제의방에서 고아 소년 바르톨로메오 가렐리를 만나게 되는게 그것이 그의 교육 사업의 하나인 오라토리오(젊은이들의 교육의 집)의 출발점이 되게 하였다.

1848년 이탈리아에서 1차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토리노 시에서는 집도 일자리도 없는 청소년들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메게 된다. 보스코 신부는 그들을 위해 두 번째 오라토리오 그리고 곧 이어 세 번째 오라토리오를 세우게 된다. 보스코는 작업장을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구두 제작, 양재, 목공기술을 가르쳤으며 교회 관련 팜플렛과 교리교육 자료들을 찍어내는 인쇄소까지 차려 인쇄 및 제본의 기술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것들이 몇 년 후엔 공업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육사업이 번창해 가던 1845년 7월에 콜레라가 리구리아 지방으로부터 시작하여 토리노까지 번져오자 보스코는 44명의 젊은 봉사원들과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것은 많은 환자들을 살려내는 업적과 함께 그를 도와 일하는 사제와 수사들의 숫자를 늘어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요한 보스코는 그가 교육시키고 있던 젊은이들 중에서 그의 사업의 협력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척 구성원으로 1859년 살레시오회를 창설했고 점차 광범위한 선교 및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나아갔다. 1860년 7월 30일에는 루아 미카엘이 사제성품을 받음으로써 보스코가 교육한 젊은이들 중에서 최초의 사제가 태어났다. 1863년 살레시오회의 사업이 처음으로 토리노 밖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미라벨라 몽훼라토의 소신학교였다. 그 뒤를 이어 여러 지역에 오라토리오들이 세워졌다. 요한 보스코 생존시 이미 6개국에 64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회원은 770여명이나 되었다. 1872년엔 살레시오 여자 수도회인 「도움의 마리아의 딸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1875년 11월 11일엔 남미로 떠나는 10명의 살레시오회원들에게 십자가를 수여함으로써 해외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보스코의 교육사업과 선교사업은 젋게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요한 보스코는 같은 해에 그가 「살레시오회 외부 회원들」이라 부르던 「협력자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청소년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요한 보스코의 사업의 협력자들로서 기도와 함께 경제적인 도움을 베풀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2세의 요한 보스코는 미소를 지은 채 평온히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임종 직전 침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살레시오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라디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요한 보스코는 1929년 6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4월 4일 시성되었다. [가톨릭신문, 2000년 10월 29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2)


2. 영성사 안에서의 기여

1) 요한 보스코의 영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영성가들은 프란치스코 드 살, 로욜라의 이냐시오, 아빌라의 데레사, 필립보 네리, 빈첸시오 아 바오로, 알퐁소 드 리구리 등이었다. 보스코는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사도직에서 온유함과 인내가 요구되었기에 온유와 애덕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을 본받고자 하였으며 로욜라의 이냐시오로부터는 악에 대항하는 열정적 싸움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는 그의 교육 영성을 형성하고 실현하는 데 있어 성 필립보 네리의 기쁨의 정신과 교육 방침을 많이 참고하였으며 성 알퐁소 드 리구리의 윤리적 가르침을 적용하였다. 그는 또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 그리고 한결같은 평온함을 본받고자 하면서 청소년들을 교육 하였다.

2)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 사목을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깊이 인식했고 그 소명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면서 투신하였다. 요한 보스코는 17세기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발전했던 관상적, 학문적 영성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 보다는 활동적, 실천적 영성이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에 응답하는 길임을 깨닫고 그것을 택했다. 그의 시대는 사회 상황의 변화와 산업 혁명으로 인구의 도시 집중, 통일 국가에 대한 열망, 유럽 식민지 팽창 등으로 인해 정치, 경제, 문화 등이 급속히 변화하고 혼란스러워 많은 젊은이들이,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그들을 교육하고 선도해야 할 사명감을 일찍부터 자각했고 준비하였으며 그에 온힘을 기울였다. 한편 그는 성령의 도구로서 활동하는 데 요청되는 적절한 카리스마를 풍성히 받았었 기에 그의 사도직은 더욱 성공적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근본적으로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현실생활에 필요한 존재들이 되도록 복음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하였다.

3) 요한 보스코는 '예방 교육방법' (preventive system)을 도입하여 젊은이들 교육과 지도에 힘썼는데 이 교육방법은 교육사에 획기적 으로 공헌했을 뿐 아니라 영성사 안에서 독특한 교육 영성의 장을 이룩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참된 인간적. 영적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 교육의 원리와 방법은 이성(理性), 종교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 표현될 수 있다.

4)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의 체계는 여러 교육 사상을 받아들여 독창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그의 교육 체계엔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과 교육, 영성 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바탕이 되었다. 다른 하나의 영향은 당시 피에몬테에서 성행하던 얀센주의적 교육 사상이다. 요한 보스코는 원죄로 인해 인간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다고 주장하면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금욕적이던 얀센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개념과 교육방법 중 일부를 수용하였다. 인간의 나쁜 성향을 억제시키는 데 도움되는 방법과 규율, 교육자의 임무에 대한 규정으로서 늘 깨어있는 자세, 청소년들이 죄를 범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기 위한 적극적 대책 등 긍정적 요소들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실천 방법과는 달리 보스코는 청소년들이 즐겁게 지내고 스스로 여러 방법으로 표현하기를 바랬으며 필요시에만 그들을 통제했다. 그는 얀센주의자들이 거부했던 애정, 관심, 경쟁, 창의력 같은 인간적 수단을 교육에서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루소의 교육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얀센주의자들과 달리 루소는 인간이 본래 선하게 태어났으나 사회가 인간을 악하게 만들기 때문에 아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 자연상태에서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 보스코는 원죄 교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를 닮아갔다. 그는 수많은 창의적 가르침을 활용했고 가능한 한 교육에 많은 즐거움의 요소를 도입하며 산책이나 소풍, 인생경험, 독서를 통해서 필요한 교훈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자발성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루소와 달리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며 저절로 진리와 선을 지향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이 교육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착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교육자가 통제할 수 없는 악한 성향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요한 보스코에게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은 당시 교육 사상과 활동의 중심지였던 토리노 대학에 만연되어 있던 자유정신이었다. 특히 그의 친구이며 교육 사업을 도와 준 철학자 안토니오 로스미니에게서 교육 철학적 영향을 받았다. 실로 보스코의 주요 교육 방법들이 로스 미니의 논문에서 발견된다. 요한 보스코는 로스미니 교육철학의 원칙 들을 그의 예방 교육의 근본 요소인 이성, 종교, 사랑으로 새롭게 발전 시켜 정리했다. 그의 교육활동의 핵심은 전인적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5) 평생 부지런히 일하며 청소년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인 성 요한 보스코는 또한 청소년 견습공들의 수호 성인이다.

그는 농촌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우며 일을 배우고 몸에 익혔다. 그는 또한 기술자들이 많이 살던 카스텔 누오보 에서 자라면서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장인(匠人)들의 일솜씨를 지켜 보았고 어깨 너머로 그것들을 배웠다. 두뇌가 명석했고 눈썰미가 좋았 으며 재주가 비상했던 그는 기술자들의 솜씨를 암기했다가 곧잘 모방 하였다. 그러한 눈썰미와 일솜씨는 그가 중등학교 시절 학비를 마련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대장장이, 제화공, 목공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야했던 것이다. 그러한 경험들은 뒷날 가난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며 도울 수 있게 되었고 직업 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기술을 습득시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고 고무 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살레시오회원들 뿐 아니라, 그의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도록 가르치고 독려했을 뿐 아니라 언제나 몸소 그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일을 줄이거나 중단하지 않았다. 그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동료들이며 분신들인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에서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도 여전히 점점 확대되고 발전하고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한 교서(1958. 1.17)를 통해 성 요한 보스코를 청소년 견습공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노동 및 사회 보장부 루이지 구이 장관은 성 요한 보스코를 청소년 견습 노동자들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해 줄 것을 겸허하게 청원하였습니다. 성인은 출중한 인물이며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공적을 끼친 분으로서 진보의 최전선에 스스로 나서서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각종 직업 교육을 시켰으며 정직 하고 경건한 생활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를 하느님 앞에서 이탈리아 청소년 견습공들을 위하여 천상 수호자로 택하고 선언하며 영구히 선언하고 확정합니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5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3)


3. 예방 교육

요한 보스코가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도직은 젊은이들의 참된 인간적.영적 양성을 위한 종교 교육이었다. 그는 교육의 이론 가라기보다는 교육실천가로서 참신하고 획기적인 교육 방법을 도입하여 젊은이들의 교육과 지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것이 바로 '예방 교육 방법' (preventive system)이었다. 훌륭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처럼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가족적인 교육 환경을 만들고, 형제적 친밀감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또한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그들을 선으로 이끌고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요한 보스코가 교육에 도입하고 적용한 혁신 방법이었다.

1) 예방 교육의 기본적 원리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강압적인 것으로 여긴 기존 교육에 대응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서 악을 사전에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약보다 위생을, 치료보다 예방 건강을 중시하는 현대의학의 발전적 경향과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강압적 방법은 학생들이 규칙을 위반하거나 잘못 처신 했을 때 그들을 처벌하거나 강제로 가르치는 것이고, 예방적 방법은 친절로 그들이 규칙을 잘 지키도록 돕고 목표 달성을 위해 그들에게 가장 적당하고 효율적 수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교육의 첫 원칙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학생들의 마음에 넣어주는 것이고 교리 교육과 윤리 교육을 통해 선에 대한 애착과 악에 대한 혐오감을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에 의해 그리고 실천적 신앙생활을 통해 성성에 이르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학업, 노동 그리고 그들의 놀이에서 도 언제나 친절한 도움을 준다.

그는 바람직한 인간성 형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나쁜 습성, 악의 유혹을 예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방은 엄한 벌 이나 책망보다 친절한 사랑과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 신심을 실천 하도록 돕는 데 있다고 확신하며 사랑, 이성, 종교를 예방 교육 방법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육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 즉 인간적.영적으로 성숙하는 전인(全人)양성이었으며, 그 교육의 영성은 아이들을 사랑하시어 언제든지 기꺼이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의 많은 결실 중 손꼽을 수 있는 하나는 소년 성인 도메니코 사비오를 배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 이성(대화와 합리적 설득)

요한 보스코에 의하면 이성은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순응하도록 이끌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용하고 가르치며 실천해야 할 방법 중의 하나였다. 교육자는 젊은이들 스스로가 올바른 분별력을 통해 학업 뿐 아니라 규율 준수나 부과된 벌, 나쁜 습성의 교정 또는 전례와 성사 생활의 의미, 실천의 당위성 등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도록 합리적 방법으로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들이 자발적으로 규율 준수 뿐 아니라 부과된 모든 과제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된다.

나) 종교(복음적 신앙 교육)

요한 보스코는 예방 교육에서 신앙 생활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악습 예방은 물론이고 올바른 생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교육 사목 체험에서 젊은이들이 고해 성사와 성체 성사를 합당하게 자주 받으면 그들의 인간적.영적 형성에 효과적 결실을 얻는 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러한 생활에서 교육자의 솔선 수범이 참으로 중요하다.

다) 사랑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그의 교육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랑(1고린 13, 4~7 참조)에 대한 바오로 가르침에 토대를 둔다. 예방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며 그들의 잘못과 연약함까지 이해하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애정 어린 협력 관계이므로 사랑을 그의 교육의 최고 원리로 여겼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젊은이들을 사랑해야 할뿐 아니라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보스코는 그들 가운데 좥현존하는 것좦과 그들을 위해 '항구하게 일하는 것' 을 사랑 교육의 두 원리로 채택하였다.

2) 특성

요한 보스코의 교육은 언제나 복음적 사랑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행해 졌으며 평화롭고 신뢰에 찬 가족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며 이루어졌다.

가) 가족 정신

가족 정신은 복음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의 교육의 근본 이상 이며 지도 이념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오라토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요한 보스코는 젊은이들과 협조자들 가운데서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오라토리오를 대 가정처럼 운영했고 평화로운 기쁨이 그 공동체를 감싸 도록 하였다. 그 안에서 젊은이들에게 규율과 바른 행위에 어울리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그러한 가족 정신 안에서 기쁨이 체험되었으며 마음의 개방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그 안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나) 만남과 대화

가족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대화는 젊은이들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길이다. 요한 보스코는 개인적인 만남과 대화의 시간들을 영성지도의 기회로 적절히 이용했으며 흔히 고해성사로 끝나도록 했다.

그는 또한 밤 인사(Buona notte) 시간을 교육의 좋은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것은 학생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짧게 사랑의 인사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주로 일상생활에서 도움되는 교훈이나 명언 혹은 감명을 주는 일화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율동으로 구성된 오락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며 항상 즐겁게 그들과 어울렸으며 그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조언해 주기도 했다.

다) 효율적 처벌과 훈계

그는 가능하면 처벌보다는 칭찬을 통해 그들이 올바른 행동을 계속 실천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처벌해야할 경우엔 그 벌이 감정적 화풀이가 아니라 오직 학생 자신이 나쁘게 행동했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도록 해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훈계나 처벌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의 감정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마음을 열고 산보를 청하거나 일이나 놀이에 초대하여 대화하면서 진상을 규명하였다. 그는 학생들이 이성과 신앙으로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내와 신중함 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꾸중은 개인적으로 해 대중 앞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요한 보스코는 '귓속말' 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효율적인 권고와 훈계를 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19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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