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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신약]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 루카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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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8-22 ㅣ No.1704

‘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 루카 15,11-32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

 

 

공동체가 로마에 진출하기 전, 이태리 수녀원 기숙사에 있을 때 몸이 아픈 적이 있었다. 의료보험도 없고, 한국에 연락하면 어른들께서 걱정하실 것 같아 이런저런 방법을 찾다가 무료진료소를 찾았다. 50명 정도 되는 이들이 줄을 서있는데, 대부분 값싼 장식물로 치장하고 온몸에 문신을 한 이들, 옷인지 조각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을 걸친 이들로, 거의가 제3국에서 온 체류허가증이 없는 가난한 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오히려 그들이 더 놀라는 눈치였다. ‘수녀가 왜 이곳에 오지?’ 하는 의아스럽고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들은 원숭이 보듯 나를 둘러쌌다. 그곳을 찾은 나 자신이 싫고 창피하고 무섭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모두가 나를 주시하고 있어 나는 문을 향해 걸어갈 용기조차 없었다.

 

기억으로 20분 남짓 기다렸던 것 같은데 내게는 몇 년이나 된 것처럼 긴 시간이었다. 그곳이 지옥같이 느껴지는 순간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그들 가운데 줄을 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그래, 예수님이 아프셨으면 그분은 가난하셨기에 이곳에 오셨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신기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들에게 웃어줄 수 있었다.

 

나에게 이 체험은 어떤 선택(영적, 육적)을 하게 될 때 가난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었다. 내가 따르고자 하는 그분은 가난한 분이시며 특별히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 곧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가난은 많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고통을 통해 그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또한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함으로써 하느님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과 세상의 부가 주는 행복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가난한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난한 이를 만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게 주신 여러 은총(재물, 능력 등)을 나눔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일상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복음서 저자는 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말하고 있다. 곧 그는 값비싼 자주색 옷(겉옷)과 고운 아마포 옷(속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부자로서 특권을 누리며 살았다.

 

부자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집 대문에는 라자로가 있었다. 라자로는 히브리어 ‘엘레아자르(Eleazar)’의 음역으로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의미의 ‘가난한 이’를 뜻한다. 라자로는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고픔을 채우길 원하고 있다. ‘종기’라 함은 부정(不淨)함의 표징으로 불결함을 나타내며 ‘누워있었다’라는 표현은 그가 구걸하러 다닐 수 없는, 곧 발로 지탱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이란 아마도 부자의 손님들이 손을 씻은 빵조각이나 그들이 식탁 밑으로 흘린, 또는 개들이 먹다 버린 것일 수 있다. 라자로 옆에는 길을 헤매는 더러운 개들이 와서 그의 상처를 핥고 그를 괴롭히지만 그는 그 개들을 쫓아낼 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의 집을 드나들지만 그들은 라자로를 보지 않고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다.

 

 

반전된 두 사람의 운명

 

가난한 사람, 라자로가 죽자 그를 ‘천사들이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그의 장례가 보잘것없이, 소홀히 취급되었기에 이야기는 그가 무덤에 묻혔음을 말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곁’이란 유다적 표현으로 의로운 영혼들이 평화롭게 머무르는 곳으로, 라자로가 하늘나라의 향연에 들어감을 묘사한다.

 

부자 또한 죽었고, 그는 세상에서의 삶 못지않게 화려하고 품위 있는 장례가 치러져 무덤에 묻혔다(22절). 저승에 있게 된 부자는 불길의 고통 속에서 고초를 겪다가 눈을 들었다. 멀리 구원된 이들과 선조 아브라함이 보였고 그 곁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늘 그의 집 대문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아닌가! 그는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라자로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라자로의 행복한 모습은 부자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온갖 사치스러운 옷을 입던 그는 불길에 휩싸여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청한다. 라자로의 손가락 끝의 한 방울의 물로라도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부자를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눈에 안타까움이 인다. 부자는 아직도 세상에서의 삶을, 곧 모든 이가 그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던 삶을 계속하려 하기에 라자로를 언제든지 마음대로 시킬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인 부자를 알고 있는 듯 ‘얘야(τεκνον)’ 하고 부르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특권이 부자의 운명을 바꾸어주지는 못한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그가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받았음과 도와주고 싶어도 큰 구렁이 있어 서로가 오고 갈 수 없음(26절)을 말한다. ‘구렁’이라 함은 아브라함과 부자가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는, 그들 사이의 친교를 방해하는 것으로 라자로가 세상에서 이미 겪은 것이었다.

 

라자로가 누워있던 대문과 부자의 식탁은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가난한 이를 도울 줄 모르는 부자의 마음으로부터는 너무도 먼 거리였다. 라자로가 그 문턱을 넘어 그의 식탁에 갈 수 없었듯이, 상황이 바뀐 지금도 라자로는 그 구렁을 넘어 그를 도와줄 수가 없다.

 

부자는 그의 삶을 돌아본다. 세상에서 재물은 그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 행복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 믿었기에 세상을 넘어선 영원한 삶, 곧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하느님이 머무를 자리가 없었다.

 

 

비움과 받아들임

 

부자는 침묵했다. 바라건대 세상에서의 그 삶을 회개하고 용서를 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살아있는 그의 형제들이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그들에게 라자로를 보내기를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고 대답한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자는 알고 있다. 성경을 삶으로 실천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수없이 율법과 예언서를 읽었지만 잘못 살고 있는 그의 삶을 고칠 수 없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30절)이라며 간절히 애원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라고 말한다. 비록 죽었던 사람이 가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이 열려있지 않다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 마음이 열려있는 이는 기적이 없어도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 또한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이다.

 

비유 그 어디에도 세상에서 부자가 잘못 살았고 라자로가 잘 살았다는 언급이 없다. 그렇다면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고 라자로는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일까? 그 답을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큰 부자(창세 13,2)였지만 자기 집을 찾는 이들을 잘 섬기고 나누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누고 베풀 줄 모르는 인색함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마태 25,40)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자는 하느님 대신 재물을 섬겼고, 라자로는 비록 고통 속에 살았지만 하느님께 의지했다.

 

 

새김 -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게 사셨다. 그분의 이 외면적 가난은 내면적 가난의 결과로 아버지에 대한 순명이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신 분이 비천한 인간이 되셨고, 죽기까지 당신을 다 비우셨다. 아버지에 대한 그분이 온전한 내어드림과 비우심이 나를, 우리를 구원하였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우리의 내어줌과 비움은 어떠한가?

 

기도 - 주님, 가난한 이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을 봅니다. 라자로를, 마리아 막달레나를, 지금 고통 중에 우는 이들을…. 저희가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고 그들을 향한 당신의 가엾은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저희의 마음을 열어주소서.

 

* 박미숙 레지나 - 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경향잡지, 2011년 7월호, 박미숙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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