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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의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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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96

순교자의 이름들

 

 

사람은 이름을 갖는다. 이름은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를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로 전환시킨다. 최초의 작명가는 하느님이었고,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이 있어 인류사회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뜻을 이어받아 인간의 계속적 창조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도 자신의 자식에게 경건한 기원이나 기쁨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땅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신앙을 갖기 이전부터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름에서 우리는 그들의 기원과 당시 사회의 특성을 읽을 수 있다.

 

 

이름의 종류

 

‘이름’이란 말은 좁은 의미로 명(名)만을 말하지만 넓게는 성(姓)과 명(名)을 모두 합쳐서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성이 사용되어, 천주교 신앙이 전해진 조선후기 단계에 와서는 일부 천인(賤人)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성을 갖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범죄자의 신분을 천인인 노비로 강등시키기도 했는데, 범죄자에게서 성을 빼앗는다는 것이 일종의 처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좁은 의미의 이름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은 자식이 태어났을 때 주로 부모가 붙여주는 본명(本名)이 있다. 어렸을 때에는 본명이 아닌 아명(兒名)으로 불렸다. 당시의 서민 대부분은 평생 아명으로만 불리기도 했다. 반면에 양반출신 남자가 성년에 도달하면 자(字)를 가졌다. 자는 윗사람이 그의 기호나 덕을 고려하여 붙여주게 된다. 자를 가진 다음에는 부모나 스승을 비롯한 윗사람들과는 본명을 쓰지만, 동년배나 그 이하의 사람들과는 거의 자로 호칭되었다. 여기에서 그 본명이 휘명(諱名)이란 말로 불리기도 했다. 우리 선조의 이름에는 본명이나 자 이외에 호(號)가 있었다. 호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는 곳의 지명을 따서 지은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인생관이나 수양의 목표를 호로 정하는 경우도 있어,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호를 가질 수도 있었다.

 

우리 교회사를 살펴보면 양반 출신 순교자나 성인들이라 하더라도 상당수의 경우 자와 호를 다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는 그들이 이미 양반 신분을 더 이상 유지하거나 고수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당시의 천주학쟁이들은 성리학적 양반 문화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나 호 대신에 그들은 세례명을 가지게 되었고, 오히려 이를 ‘본명’이라 불렀다. 그들이 사용하던 본명이란 개념은 당시 사회의 통념과는 무척 달랐다.

 

 

초기 신자들의 이름들

 

1801년의 박해에 관한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휘명(諱名)과 자와 호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승훈(李承薰)은 자가 자술(子述)이었고, 호는 만천(蔓川)이었다. 일부 남자 신도들 가운데에는 성만 있고 한자식 명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천안지방의 천주교 신앙운동에서 주요 역할을 했던 최구두쇠[崔巨斗金]가 있다. 그의 이름 ‘구두쇠’는 이두 식으로 ‘거두금(巨斗金)’이라 기록되었다. 그의 이름은 그가 양반의 한자문화와는 거리가 있었던 인물이며, 자신의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던 떳떳한 백성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여성신도들의 경우에도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여성들은 정식 이름을 갖는 사례가 드물었다. 양반출신 여성은 어렸을 때 아명으로 불리다가, 출가하게 되면 택호를 가졌다. 서민 여성들 대부분은 그저 아명으로만 불리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순교성녀들 가운데 이 아명으로만 불리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성녀 박큰아기[朴大阿只], 성녀 이간난(李干蘭)의 경우에는 아명임에 틀림이 없다. 1801년에 유배를 갔던 이조이[李召史], 홍조이[洪召史] 등은 아명도 전해지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구애(九愛), 복점(福占), 정임(丁任) 등 성마저 없었던 비녀(婢女)들도 있었다. 이들 모두는 우리 신앙의 자랑스런 선조들이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양반 지식인뿐만 아니라 성이 없거나 이름도 변변치 못했던 존귀한 인간들을 직접적 대상으로 하여 선포되었다.

 

 

‘소사’가 이름인가?

 

조선후기에는 많은 이두어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관청에서는 백성에게 환곡(還穀)을 나누어주고 이자를 취해왔다. 그러나 환곡을 나누어주지도 않고 환곡의 이자를 받아내던 협작 행위도 적지 않았다. 이를 ‘번질’이라 했는데, 이두 식으로 표기하기를 ‘반작(反作)’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국사교과서에서는 ‘번질’로 발음되지 않고 ‘반작’으로 읽히고 있다. 이는 오늘의 우리들이 조선후기 사회나 제도와는 단절되어 있어 그 발음마저 잊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된 현상이다.

 

‘조이[召史]’의 경우에도 이 사례와 비슷하다. 우리 순교자에 관한 기록을 보면 여성신도의 ‘이름’으로 조이[召史]라는 칭호가 나온다. 분명 이 낱말은 이두 식으로 표기된 중세국어였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를 ‘소사’라고 읽지 ‘조이’라고 바르게 읽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소사(召史)라는 이두어가 ‘조이’로 발음될 수 있는 근거는 1448년에 간행된 「동국정운」(東國正韻)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소(召)’의 음이 ‘A’[sjow] 와 ‘C’ [tsjow]로도 읽히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서 이두어 ‘조이[召史]’에서 ‘조’의 음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조이’에서 ‘이’라는 음은 사(史)라는 단어의 음(4)이 방언 등의 영향으로 ‘시’로 바뀌고 다시 여기서 ‘?’ 음이 탈락하여 ‘이’로 변했다고 추정된다. 그리하여 '됴4 → 조4 → 조시 → 조이'로의 변화 과정을 거친 뒤 이두 집성자들에 의해 ‘조이’라는 음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조이’로 읽었던 사례는 우리의 고전소설을 통해서도 다수 확인된다.

 

이 ‘조이’는 이름이 아니었다. 이는 ‘서민(庶民) 출신 과부(寡婦)’를 뜻하는 보통명사였고, 양반의 과부는 성 다음에 씨(氏)를 붙여 김씨(金氏), 이씨(李氏) 등으로 불러주었다. 그러나 우리 교회사의 경우에는 그 발음마저 서투르게 하면서, 보통명사를 고유명사로 혼동해 왔다. 그래서 어엿한 양반 출신이었던 유 체칠리아 성녀에게도 조이[召史]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억측하기도 했다. 물론 과거의 기록에도 조이[召史]를 한자음대로 ‘소사’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일반관행과는 다른 발음법이었다.

 

 

남은 말

 

우리는 순교자를 공경하면서도 그 이름마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이는 시복시성을 추진하던 교회의 장상들이 우리 전통문화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임을 나타낸다. 오늘의 우리는 우리 문화와 화해하고 자신의 문화에 대해서 좀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뒤늦게나마 성인과 순교자의 이름이라도 바로잡는 작업에 매진해야 한다. 그들의 올바른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교회와 신자들의 삶과 믿음을 좀더 잘 알고 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2002년 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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