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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윤점혜 아가다: 순결한 주님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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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89

윤점혜 아가다 - 순결한 주님의 종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들 가운데는 한국의 영원한 여인상으로 기억될 만한 이들이 많다. 그리고 동정녀들의 너무도 아름답고 청순한 죽음이 있었다. 윤점혜 아가다(1766-1801년)는 그들 가운데서도 행적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는 경기도 양근 지방에서 양반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우고 '아가다'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특히 천주교의 신심생활에 심취하여 일생 동안 종정을 지키며 열렬히 기도하고,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영적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동생은 윤운혜 루치아인데 순교자 정관수 바르나바의 아내로서 서울에 살면서 부부가 함께 조선교회의 집회를 주관하였다. 이들 부부는 황사영, 김건순, 홍익만 등과 함께 교회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신유박해때 체포되어 정과수는 1801년 12월 26일 여주에서, 윤운혜는 같은 해 5월 1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북경을 세 번이나 왕래하며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밀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때 지황과 함께 의주 변문으로 가서 입국을 도와 서울까지 안내한 죄목으로 1795년 6월 28일에 체포되어 순교한 한국 초대교회의 빛나는 공로자 윤유일 바오로 또한 그의 사촌 오라버니이다.

 

윤점혜 아가다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를 위하여 동정의 순결한 삶을 바랐으나 당시의 조선 풍속으로는 어려운 일로 집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는 자신의 결심을 지키려고 남몰래 남정네 옷을 지어 입고 친척집으로 도망갔다. 어머니는 그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줄로 알고 슬퍼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어머니께로 돌아왔지만 가족은 여전히 그의 결심을 이해하지 못했고 가족들의 간청과 불평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에 대한 열의가 더욱 깊어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앙의 은혜를 마련해 주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1795년 윤점혜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와서 살 때는 아직 세례성사를 받지 못했을 때였다. 그런 때 사촌오빠인 윤유일이 주문모 신부 영입에 헌신하다가 관아에 잡혀가 재판을 받고 사형 당하였다. 이 일로 사촌인 윤점혜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에 대한 열정을 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그를 도와 주님의 일에 헌신하며 살기를 열망하였다, 강완숙이 그를 받아들이지 그곳에서 처녀들과 여인들을 모아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교리를 가르쳤다. 윤점혜는 자신의 성화에도 놀라운 열성을 보여 매우 엄격하고 절제하는 생활 속에 잦은 금식과 극기로 단련하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하였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깊게 완덕의 길로 나아가 아름다운 덕행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특별히 영적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윤점혜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성사를 받지 못한 것이 늘 한탄스럽고 염려스러워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성모님과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놀랍고 기쁨에 벅찼지만 다음 순간 이 발현이 헛된 꿈이나 악마의 장난이 아닌가 염려하여 곧 자신이 본 것을 주문모 신부에게 말하였다. 신부는 그 일을 좋게 해석하여 안심시켜 주었고, 윤점혜는 사제에게 영적지도를 받고서야 평화를 얻고 기도생활에 더욱 증진하였다.

 

그는 또 한번의 발현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성모님의 발현이었다. 성령께서 하늘의 모후 위에 내려와 머무시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이제 지극한 겸손으로 이러한 은혜가 실제로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감히 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영적 지도를 받았다. 그때 마침 성령께서 성모님의 성심에 함께 하는 상본을 갖고 있던 주문모 신부는 그것을 보여주며 그를 진정시켜 주었다. 윤점혜는 더욱 겸손하게 침묵하며 자신의 내적 체험을 소중히 간직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호성인인 성녀 아가다에 대한 공경심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나도 아가다 성녀처럼 순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하였다.

 

남의 영혼을 구하는데 지칠 줄 모르던 윤점혜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이웃에게는 너그럽고 온화한 모습으로 헌신하였고, 여러 모임을 주관하고 이끌며 모범을 보였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매우 높은 덕행을 닦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고, 그의 이름은 강완숙과 함께 널리 알려졌다. 봉사하고 기도하며 깊은 영적 체험을 했으면서도 오히려 더욱 침묵 속에 겸손했고 그토록 순교를 열망했던 윤점혜는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순교의 소원을 마침내 이루게 되었다.

 

1801년 2월 말, 곧 신유박해가 초기에 윤점혜는 강완숙과 함께 체포되어 석달 동안 옥고를 치르며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천주교를 박해하며 신자들을 심문하고 형벌을 가하던 관리들은 윤점혜를 문초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강완숙의 집에서 살았던 세월이 10년이나 되며 강완숙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것을 모두 배웠다. 처음에는 신부를 모신 일이 없다고 했으나, 강완숙의 집에서 신부, 교우들이 모여 기도하고 천주교 예절에 참례할 때 그도 함께 했으며, 천주교를 매우 열심히 믿고 따라서 '비록 형벌로 죽음을 당하더라도 마음을 고쳐먹을 뜻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사학에 고혹된 모양은 포청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고향을 떠나와 살고 있지만 본래는 양반의 딸로서 지난 을묘년에 처녀를 보전하려고 몸에 상처를 내어 그 동생과 함께 집을 떠나 도망쳐 나왔던 것이다. … 처음에 그는 적당히 내세울 사람이 없어 과부로 자칭하였다. … 남의 집에 더불어 살며 처녀도 아니요, 과부도 아니면서 허씨의 아내로 보이게 하였다.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은 인간의 큰 도리인데 작고 어린 여자가 그런 행동을 하여 풍속을 상하게 하고 부패시키며, 분명히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도 시집간 사람처럼 하니 어찌 천지간에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윤점혜는 수녀원이 없던 때에, 또 당시 조선사회에서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풍속 때문에 부득이 허씨라는 사람의 부인으로 과부 행세를 하며 동정을 지키고자 했다. 이것이 풍속을 어긴 천지간에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이다.

 

윤점혜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0년을 신앙의 동지로 살았으며 3개월간 옥고를 함께 치른 강완숙과 같이 죽기를 원했으나 결국 강완숙은 서울에서, 그리고 윤점혜는 이틀 뒤 1801년 5월 24일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각기 순교의 거룩한 피를 흘렸다.

 

두 여인의 불굴의 의지와 거룩한 순교는 외교인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으며, 하느님께서 특별히 윤점혜의 순결에 대한 헌신을 빛나게 하시려는 듯 형장에 흘린 그의 피가 젖빛처럼 희게 보였다고 한다.

 

[경향잡지, 1999년 8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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