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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권 빈첸시오: 조국의 복음 전파에 힘썼던 최초의 예수회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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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87

권 빈첸시오 - 조국의 복음 전파에 힘썼던 최초의 예수회 수사

 

 

1867년 7월 7일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일본의 순교자 205명을 복자로 선포하셨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열 명의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강제로 잡혀가 일본에서 살다가 순교한 고결한 신앙의 선조들이다.

 

명나라를 틸 테니 길을 내달라는 당치도 않은 명분으로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이렇게 시작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이어져 7년을 끌었다. 집과 마을은 불타고 무수한 생명이 싸움터의 고혼이 되었다. 강산은 피로 물들고 왜군의 발굽에 짓밟힌 곳마다 가슴 아픈 한숨이 서리고 통한의 눈물이 고였다. 낯선 땅 일본으로 끌려가서 망향의 여생을 살았던 사람만도 오만 명이 넘었고 일본군에 잡혀 포르투칼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간 사람들의 수도 헤아릴 수 없어 이국 깡에서 서럽게 살아가며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그 피눈물 어린 삶을 영광으로 빛나는 신앙생활로 승화시켜 주옥같은 생애를 남긴 이들이 있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권 빈첸시오(1580-1626년)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빈첸시오의 아버지는 조선의 고관이었다. 그는 전선으로 나가면서 열세 살의 어린 자식인 빈첸시오가 목숨을 보존할 수 있도록 은신처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어린 아들은 두려움도 모르고 은신처에서 나와 싸움터를 구경하다가 곧장 대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천막까지 가게 되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자신의 천막으로 온 전쟁 고아를 보고 불쌍히 생각하여 그의 딸이며 또한 열심한 천주교 신자인 마리아(대마도주 소 요시모토의 부인)에게 보냈다. 마리아는 아버지가 전선에서 보낸 어린아이를 잘 보호하며 교회에 맡겨 교육시켰다. 그 아이는 1603년 규슈의 시키 섬에서 빈첸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렇게 하여 전쟁 중에 버려져 이름도 잊혀버렸던 어린아이는 권 빈첸시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빈첸시오의 성은 일반적으로 권씨로 보지만 강씨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의 일본 이름은 '가베아'라 했다.

 

권 빈첸시오는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깊이 잠긴 채 믿음직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게 해준 신부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들 곁에 머물렀고, 신부들의 포교와 사목의 여행길에도 항상 동행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켯던 도요코미 히데요기의 뒤를 이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지고 신부와 수사들이 살해당하고 여러 곳의 성당이 파괴되더니 마침내 1637년에 시마바라 반도에서 3망 7천여 명의 신자들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에 진출해 있던 예수회에서는 일본에서 박해가 심해지자 동양 전교의 새로운 전초기지를 얻으려고 권 빈첸시오에게 그의 조국인 조선에 들어가 가능성을 확인해 보게 하였다. 빈첸시오는 바다를 건너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을 치른 뒤 조선정부의 해안감시가 철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발길을 돌려 중국으로 건너가 육로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면서 빈첸시오의 젊은 가슴은 사도적 열의에 불타고 조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꿈으로 부풀어올랐다. 북경과 압록강 변경을 오가며 7년을 한결같이 애썼지만 그의 꿈은 북만주의 고아야에서 외롭게 피어올랐을 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누루하치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국과 조선의 긴장상태가 계속되어 그의 뜻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비록 꿈에 그리던 조국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선교를 위해 전루 14년 동안 땀을 흘린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620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 권 빈첸시오는 시미바라 반도에 숨어서 졸라(Zola) 신부와 함께 일본인과 임진왜란으로 억울하게 잡혀온 수많은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열렬한 증거의 삶을 살았다. 조선 사람들에 대한 그의 감화력은 놀라웠으며 동포들은 그의 모범과 격려에 크나큰 위안을 얻었다.

 

권 빈첸시오는 자신을 예수님안에 다시 태어나게 해준 데 대한 애정과 감사의 정이 깊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사제들과 함께 1625년 체포되어 시마바라의 감옥에 끌려갔다. 그곳은 특히 천주교 신자들을 괴롭히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감옥이 아무리 끔찍했어도 권 빈첸시오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감옥의 온갖 형벌과 가혹한 박해를 극기와 자기 정화의 계기로 삼았다. 그에게 심문과 형벌은 영신수련의 기회가 되었을 뿐이다.

 

그의 거룩한 극기의 삶은 포악한 포졸들마저 감동시켰다. 옥졸들이 빈첸시오를 존경하며 스스로 유순한 사람으로 바뀌자 관장은 놀라워하며 곧 다른 옥졸로 바꾸었다. 그러나 바뀐 옥졸들마저 잇달아 수감자의 천사 같은 모습에 감동하여 빈첸시오를 따라 신앙을 갖게 되자 관장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관장은 자신의 친척이 되는 무관에게 수감자 감시를 맡겼는데 그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사나운 짐승과 같은 자로서 천주교를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관이 권 빈첸시오와 동료 순교자를 만난지 일주일이 지나자 그 태도가 놀랍게 바뀌어 온순하기 짝이 없게 되더니 또 일주일 뒤에는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자 관장은 분하게 여겨 그 배신감을 갚기라도 하듯 무관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무관은 이제 짐승과 같았던 과거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의 직책과 재산을 박탈하고 목숨마저 빼앗을 수 있을지라도 저의 정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니, 저는 천주교인으로 살고 또 천주교인으로 죽겠습니다."

 

관장은 빈첸시오와 그 동료들의 놀라운 감화력을 막으려고 증거자들을 따로 떼어 서로 격려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더욱 가혹한 형벌을 주기로 결심했다. 빈첸시오는 가혹한 형벌과 온갖 달콤한 유혹과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천주교인입니다. 결코 배교는 못하겠습니다." 관장은 권 빈첸시오의 옷을 벗기고 찬바람에 내놓고 단근질을 하며 참혹한 학대를 계속했다. 관장은 이성을 잃고 직접 곤장을 들고치기도 했다. 권 빈첸시오는 이 무서운 형벌을 받으면서도 조용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관장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독약을 먹여 피를 토하게 했지만 그의 잔잔한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누구도, 어떤 가혹한 형벌도 거룩한 증거자 권 빈첸시오를 꺾을 수는 없었다. 빈첸시오는 추위를 막을 수 없는 엉성하고 작은 오막살이에서 24일 동안을 먹지도 못하고 내버려진 채 고통을 겪으며 기진해 갔다.

 

일본 왕은 이 거룩한 증거자를 나가사키로 옮겨 화형에 처하게 하였고, 1626년 6월 20일 졸라 신부, 토래 신부, 파체코 신부 등과 함께 화형이 집행되었다. 권 빈첸시오는 화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에 감옥 안에서 당시 예수회 일본 관구장이던 파체코 신부에게 자신을 예수회에 입회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신부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이미 사형이 확정되었기에 주님께 자기 제헌을 하게 될 그 자리에서 그의 서원을 받았다. 이로써 권 빈첸시오는 정식 수사로서 순교자가 된 것이다. 조국에 복음 전파를 시도했던 최초의 한국인이며, 최초의 예수회 수사인 그는 지금 일본의 순교 복자 205위 가운데 한국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경향잡지, 1999년 5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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