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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유성태 라우렌시오: 배교자 속에 보석 같았던 증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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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84

유성태 라우렌시오 - 배교자 속에 보석 같았던 증거자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826년 우리 나라에 난대없이 서신을 보냈다. 그 내용은 일본에서 천주교 신자 6명이 배를 타고 도망쳤는데 아마도 조선으로 갔을 터이니 체포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정은 신장했고, 관헌들의 천주교인 수색은 강화되었다.

 

이는 1801년 신유박해가 마무리로 반포된 처사윤음(斥邪倫音)이 천주교 탄압의 법적인 근거가 되어 박해가 계속되게 하였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전개하던 교회 재건과 사제 영입운동을 더욱 어렵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1827년 음력 2월에 전라도 곡성에서 천주교인 밀고사건이 일어나 전라도 전역과 경상도 상주,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 지역까지 박해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다. 가장 박해가 심했던 전라도 교회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한 분의 사제도 없이 대부분 예비신자였던 까닭에 이 박해 때 어느 시기보다도 배교자들이 더 많았다. 이 어려운 시기, 동료들이 신의를 버리고 떠난 빈자리에서 마지막까지 주님을 증거한 소수의 남은 자들은 보석처럼 빛나는 증거자가 되었고, 유태성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라도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丁亥迫害)가 전라도 전역에 파급되어 2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전주 포졸들이 신태보를 추적하자 경상도 상주까지 박해의 불길이 번졌다. 유순지라고도 불리는 유성태(1789/1794-1828)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단양의 깊은 산골로 박해를 피해 이주했다. 그가 단양으로 피신하자 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던 친척들도 그에게도 왔다. 유성태과 그의 친척들은 깊은 골에 모여 기도하며 숨어서 박해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소박한 소원은 밀고자 때문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들은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1827년 5월에 체포되었다. 밀고자와 포졸들은 밀고로 받은 상금을 나누어 가졌고, 단양으로 잡혀간 신자들은 혹독한 심문과 온갖 고초를 겪었다.

 

형벌이 더욱 심해지자 잡혀간 교우들은 하나둘 배교하기 시작했다. 유성태는 그들의 나약함을 타이르고 주님께 충실할 것을 피눈물로 호소했다. 그러자 관장은 라우렌시로를 그들의 지도자로 지목하고는 더욱 심하게 형벌을 가했다. 마침내 천척들과 신앙의 동지였던 교우들이 배교하기 시작했고, 유성태만이 홀로 남아 버티게 되었다. 관장은 유성태의 굳건한 의지를 짐작하고는 교활한 술책으로 회유했다.

 

관장은 배교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들 놓아주고 싶다. 그러나 너희 두목인 유성태가 배교하지 않으니 아무도 놓아줄 구 없다. 이 놈만 배교한다면 모두 놓아주리라." 배교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유성태를 원망했다. 이들의 원망은 갈수록 심해져 외롭고 상처투성이인 유성태를 더욱 참담하게 했다. 유성태는 최후의 열정을 다해 간절하게 그들을 격려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이 지겨운 옥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들이 풀려나지 못하는 책임이 유성태에게 있기라도 한 듯이 그를 못살게 굴기까지 했다. 그에게는 형리들의 매질보다 동료들의 배신과 원망이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유성태는 어쩔 수 없이 배교한다고 하였고, 모두 함께 석방되었다.

 

라우렌시오는 풀려난 사람들을 각기 제 갈 곳으로 보내며, 지체하지 말고 도망가라고 일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주님! 저희의 나약함을 가련히 보소서. 그리고 저들이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회두의 특은을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그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었다가 다시 단양관헌으로 돌아갔다. 관장은 배교한 그가 돌아오자 놀라고 당황했다. 유성태는 "이제 나 때문에 잡혀있어야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는 내가 먼저 한 말을 지금 취소합니다. 나는 천지대군이신 주님께 이 목숨을 바치기로 했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그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자 관장은 격노하며 사정을 두지 않고 형벌을 가했고, 유성태는 온갖 고초와 형벌을 묵묵히 참아 받았다. 그의 의지를 보고 더 이상의 방법이 없어진 단양관장은 그를 충주감영으로 이송하였다.

 

충주감영에서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그를 더욱 가혹하게 다루었으나 유성태는 변함없이 굳건한 태도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아 오히려 형리들이 감복했다. 유성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제 조용히 순교의 시간을 기다리며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형은 귀양으로 바뀌었다. 법에 따라서 죽어야만 한다"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관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함경도 무산으로 귀양보냈다.

 

관장은 그를 귀양보내면서 호송하는 포졸들에게 일렀다. "이 자가 도중에 백성들을 충동하여 몇 사람을 그 교리로 매혹할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감시하라." 이 말을 들은 라우렌시오는 "나는 도중에서 1만 명만 입교시키겠습니다"라고 했다. 관장도 유성태의 의지와 설득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감화력과 영향력을 알고 염려했던 것이다. 포졸들의 감시속에서 무산에 이르는 천리 길은 멀고도 고통스러웠다. 그는 귀양길에서 배교한 친척들을 기억하며 인간의 나약을 통절히 깨닭고 그 자신은 더욱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였다. 그리고 배교자들의 보속을 자신의 삶으로 갚으려 했다.

 

주님께 향한 그의 열정은 유배지에 도착하여 더욱 용솟음쳐 올랐다. 기도와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드러내놓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오거나 기회가 닿기만 하면 포졸, 평민 가지 않고 전교했다. 사람들이 그의 열성과 놀라운 설득력에 차츰 동요하여 교리를 듣고 호감을 갖게 되자 현지의 관장과 관원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했던 거침없는 신앙생활과 포교활동은 그들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했고, 관헌들은 그의 포교활동을 막으려고 외딴 집에 연금시켰다.

 

유성태는 연금생활을 시작하며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지만 기력을 잃어갔다. 관원들은 그에게서 반성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며 음식까지 끊어버렸다. 얼마를 굶었을까!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굶주림과 고독, 그는 소리쳐 먹을 것을 달라고 간청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음식을 그에게 갖다주게 하였다. 이 음식은 소금과 쌀가루를 섞어서 만든 떡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오랫동안 굶주린 위장에 소금덩어리 같은 떡, 먹고 나면 더 심한 갈증을 느끼며 죽게 되는 음식을 마지막으로 받아먹었다. 관장의 생각처럼 우리의 위대한 증거자는 그 떡의 반도 삼키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그의 순교일은 1827년 12월 또는 1823년 3월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나이 또한 35세와 40세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굳은 의지와 장엄한 유배생활의 모습을 전해들은 그의 친척과 동료들이 자신의 배교를 부끄러워하며 무섭게 뉘우치고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경향잡지, 1998년 1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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