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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박사의 안드레아: 관장을 감복시킨 지극한 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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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83

박사의 안드레아 - 관장을 감복시킨 지극한 효성

 

 

박보록(朴保綠) 바오로와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부자지간이면서 함께 옥고를 치르고 아버지는 옥사로, 아들은 참수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관명을 '도향'이라고 하는 박보록은 홍주 지방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산도 넉넉했으며, 고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1792년쯤 천주교에 입교했으나 1794년 박해 때 예비신자였던지라 배교한다 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신자의 본분을 열성으로 지켜가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천주님을 섬기는 데에 여러 가지 세속사정으로 지장을 받게 될 것을 걱정하던 그는 재산과 일가친지를 두고 아들 박사의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신앙생활을 더욱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충청도 단양의 산골로 숨어들었다.

 

박 바오로는 태생을 숨긴 채 토박이로 행세를 하며 세속의 근심에서 벗어나 기도를 열중하며 영혼을 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신부님을 찾아 정한 시간에 기도와 묵상에 몰두하였고, 나머지 시간에는 성서를 읽고 교리를 공부하며 신앙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넓혔다. 사람들은 바오로의 진실하고도 정성이 깃든 이웃 사라의 모범을 보고 그의 말을 경청하였고, 그의 말은 설득력이 더욱 커져 그의 집에 드나드는 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 무렵 박보록은 자녀의 종교교육에 철저하여 사의 직접 가르쳤다.

 

1827년 전라도에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주님의 섭리에 의지하고 염려하지 말라며 교우들을 격려하고 스스로 순교의 열망을 품고 죽음을 준비하며 살았다. 언젠가 몹시 앓았는데 그는 아들과 식구들에게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 앞에서는 죽지 않을 터이니."하고 말했다. 뒷날 바오로가 순교하자 사람들은 이 말이 순교를 열망하여 결코 병들어 죽지는 않으리라는 의지의 표현이었음을 알게 되어 그를 추모하였다.

 

1827년 4월 그믐, 주님 승천 대축일을 받아 바오로의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축일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에 밀고자가 데려온 포졸들이 들이 닥쳐 부자를 체포하였다. 관아에 끌려와서 무서운 고문을 당한 박보록은 고문이 되풀이되자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껴 "이제 내 육신은 관장의 손에 맡기고, 영혼은 천주님의 손에 맡깁니다.."하고 부르짖었다. 형리들이 그의 뺨을 치고 수렴을 잡아 뽑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고통은 은혜이니 천주님께 감사한다."며 놀라운 인내로 그 고통을 이겨냈다. 관장은 결코 굽힘이 없는 노령의 그에게 사형을 내리고 옥에 가두었는데 집행이 늦어져 아들과 함께 12년 동안 옥중에서 영어의 생활을 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속에 자란 박사의 안드레아는 신심생활에 열중했고, 나이가 차면서 신앙과 열성, 그리고 아름다운 효성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일상 행동에 규율이 있었고 모든 이에게 친절했으며 특히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면 그 곁을 떠나지 않았고, 또 부모가 먼저 식사를 하지 안으면 먹지 않았기에 부모는 아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억지로라도 먼저 음식을 들기도 했다. 아버지 박보록은 과음하지는 않았지만 술을 즐기는 편이어서 조금씩 반주로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안드레아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아버지가 즐기는 술을 거른 적이 없었다. 아버지께 작은 기쁨이나마 만족을 드리려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엄격히 절재하면서도 기뻐하였다. 그는 볼일이 있어서 날 때에도 돌아올 날짜와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돌아오기로 한 시간을 지키려고 비바람 속을 걷기도 하고, 밤길을 꼬박 걷기도 한 것이다. 안드레아는 부모의  조그만 눈짓이나 의사 표시라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겨 행동하였다.

 

하루는 아버지다 지나가는 말로 "우리 집이 너무 협소하단 말이야. 필요한 때에 몇 명의 교우들을 거두어주려면 방이 두세 개 더 있어야겠는데 …" 했다. 이 말을 들은 사의는 그날부터 일과를 평소처럼 하면서 외출할 때마다 어김없이 들보나 서까래로 쓸 것을 한두 개씩 들고 와 오래지 않아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방을 늘려 놓았다. 주위의 신자들이 이 복된 집에 모여들었다. 더욱이 아버지 박 바오로가 가난하지만 찾아온 손님들을 예의에 벗어나지 않게 대접하기를 바라기에 사의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더욱 근검절약 하여 손님 접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했다.

 

아버지께 대한 이 훌륭한 효성에 감동한 신자들이 얼마의 돈을 모아 너무도 가난한 그의 가게를 도와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님과 가족을 봉양하면서 진 빚은 언제라도 내가 혼자 일해서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면서 교우들이 모아준 돈을 돌려보내고, 돌려보낼 수 없는 경우에는 그것을 더 가난한 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결코 자신의 가계를 위해 쓰지 않았다. 신입 교우이면서도 여러 가지 덕을 닦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열절하게 실천하던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어 늙으신 아버지가 보여준 모범을 따라 형벌 중에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부자는 함께 상주 진영에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조선 국법에는 부자가 같은 감옥에서 동시에 옥살이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아버지가 문초와 형벌로 몹시 쇠약해진 것을 보고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지를 보살펴 드리면서 관장에게 아버지와 함께 지내도록 간절히 청원했다. 관장은 아들의 효성에 감복하여 "국법에 금하는 바이나 너의 청이 옳고 타당하니 그 지극한 효성을 보아 허락한다"고 했다. 이리하여 부자는 함께 심문을 받고 옥살이를 함께 했다.

 

형벌을 받아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안드레아는 아버지께로 가서 목에 채워진 무서운 칼을 쳐들어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드리니, 옥중에서 이 광경을 본 이들은 깊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고통을 참고이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하느님께 대한 그의 흠숭은 지극한 효성이 승화되어 완성된 덕행이었다. 수많은 고문을 끝까지 용감하게 참아내고 사형 언도를 받은 뒤 12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옥살이를 하면서도 그의 효성과 동료 신자들에 대한 배려는 한결같았다.

 

아버지 박 바오로가 고령으로 옥고를 견디지 못한 채 이곳을 지복소로 알고 항구하고 충실하게 주를 섬기라는 장엄한 유언을 남기고 먼저 선종했고, 1839년 5월 26일 아들 안드레아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옥중 교우들은 이들 부자의 모범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 덕행을 전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기억했다.

 

[경향잡지, 1998년 1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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