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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경언 바오로: 순결과 청빈으로 산 증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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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81

이경언 바오로 - 순결과 청빈으로 산 증거자

 

 

조선시대 순조 임금 때에 서울 장안에 유순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을 지닌 선비가 살았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고, 부인의 성격이 고약하여 한시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선비는 수많은 곤욕과 풍파를 놀라운 인내로 견뎠고, 얼굴에는 언제나 화기가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며 따랐다.

 

어느 날, 노파 하나가 선배의 집을 찾아와 조용히 편지 한 통을 내놓았다. 내용은 어떤 과부가 첩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간절한 청과 이를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다. 과부의 재혼을 엄격히 금지하던 그때, 젊은 과부들을 이렇게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몹시도 가난하고 또 아내 때문에 힘들게 살아온 선비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복이 제 발로 찾아 온 격이었다. 하지만 선비는 편지를 들고 온 노파를 보고 작지만 엄중한 목소리로 "우리 천주교에서는 그런 법도가 없습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노파는 천주교는 왜 넝쿨째 굴러온 복을 차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젊은 과부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예물을 갖추어 정중하게 청하라고 노파를 계속해서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매몰차게 노파를 물리쳤다. 그러나 세 번째 간절한 청을 받자 선비는 노파를 따라나섰다.

 

노파는 놀랍고도 반가워 자신의 집으로 인내한 다음 자신은 과부의 유모라고 밝혔다. 날이 저물어 유모의 안내를 받아 어마어마한 부잣집 안채로 들어가자 소복한 젊은 과부가 등잔불을 들고 나와 예의를 갖추어 선비를 맞았다.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자세로 먼저 하느님의 계심과 천지창조, 영혼의 구원, 죄와 지옥의 영원한 죽음에 대한 교리를 들려주었다. 이들의 기묘한 만난은 이렇게 이루어졌고 선비는 두 번재 만남에서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원의 신비를 설명하고 천주교의 열두 가지 기도문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는동안 과부는 유모를 통해 값진 예물과 보화를 선비에게 예속해서 보냈지만 그는 재물들을 갖지 않고 유모의 집에 모아놓으니 여전히 가난하고 궁색하게 생활했다.

 

주님은 이들의 남만을 축복해 주셨고, 과부는 선비의 가르침을 소중히 마음에 새겨 열심히 기도문을 익혔다. 그들은 부부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된 것이다. '청혼을 구원의 기회로 승화시키자!' 이것이 선비의 본뜻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과부가 갑자기 병들어 눕게 되었다. 병은 급격히 악화되어 백 가지 약이 효과가 없었다. 유모로부터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은 선비는 그녀의 집으로 가 열정을 다해 아직 들려주지 못한 교리를 알려준 다음 대세를 주었다. 과부는 선비의 마지막 설교와 대세를 받은 지 3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과부가 세상을 떠난 뒤 유모는 그 동안 과부가 선비에게 보낸 수많은 재물을 선비의 몫으로 주려했다. 그러나 선비는 과부의 친척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그 동안 과부에게 빌려 쓴 돈을 갚는다는 이유로 재물을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이처럼 영웅적인 순결과 청빈을 동시에 실천한 이종회라고도 불리는 이경언 바오로(1790-1827년)이다. 그는 1801년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와 우리 순교사의 꽃인 동정부부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와 한 형제로, 참으로 천주교인다운 가정에서 훌륭한 종교교육을 받고 자랐다. 이경연은 몹시 가냘프고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강인한 성격과 유순하면서도 사려 깊고 동정심이 많은 착한 마음을 지녔다.

 

1801년 박해 때 그의 형과 누이가 참수당하니, 지체 높은 왕가의 후예였던 가문은 몰락하여 관직에서 추방되었고, 재산은 약탈당해 완전히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그때 겨우 열한살 이었던 바오로는 홀어머니와 형수와 함께 서울에서 가난하고 구차하게 살던 중 나이가 차서 중인(中人)집안의 처녀와 혼인하였다. 하지만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어려워지자 1815년에 어머니와 형수를 충청도 연풍에 사는 큰 형 집으로 보내고, 이들 부부만 서울에 남은 것이다.

 

이 바오로는 끓임 없이 성서를 읽었으며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교우들의 집을 방문하기를 좋아하며 교리 전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그는 냉담자들을 만나면 정성을 다해 권고하거나 열띤 토론과 뛰어난 변론으로 교우들을 격려하며 깨우쳤다. 또한 지지리 가난하면서도 불쌍한 이웃을 보면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썼으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곤경을 덜어주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겸손되이 청한 이경언은 이를 알려준 형제에게 감사했고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쳤다. 이러한 그의 심경은 옥중에서 현석문에게 쓴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 … 정말이지. 우리들의 우정은 보통의 우정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아무도 내 결점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니 지금 곰곰이 생각하면 형은 참으로 나의 보물이었습니다. …"

 

그는 기도와 묵상에 전념할 때는 주위에 누가 있어도 알지 못하였으며, 또 여인과 대화할 때는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아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경언의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의 모범된 자세를 따르려는 이들이 더욱 늘어났으며, 수많은 냉담자들이 회개했다. 또한 바오로는 생계의 한 방편으로 성서를 베끼고 상본을 모사하여 교우들에게 팔기도 했는데, 사실 그 돈의 대부분은 북경에 보내는 한국교회의 밀자들을 위한 여비로 쓰였다. 그는 북경 밀사 파견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데 가장 많은 힘을 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북경의 주교가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될 남녀 회장 몇 사람을 선발하라고 명하자 바오로는 회장들을 양성하는 데 열성을 보여 첫째 주일마다 자신의 집에 회장 후보자들을 모아 묵상 자료를 주며 참되 신심을 가지도록 격려했다.

 

마음속으로 항상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녔던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하라고 권고하며 "방방곡곡에 천주교를 퍼뜨리려면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증거라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1827년 전라도에 박해가 일어나고 전주에서 문초가 벌어지자 그가 베껴서 전파한 책과 상본이 고발되어 전라감영에서 파견된 포졸들한테 같은 해 4월 21일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관헌들 앞에 출두한 이경언은 형과 누이의 영광스러운 발자취를 따라 용감히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였다.

 

1827년 6월 27일 옥중에서 기진하여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이경언 베드로 쓴 수기와 편지는 교회사의 소중한 자료로 전해진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경언을 "조선교회의 가장 위대한 영웅의 하나!"라고 하였고, 그의 신앙고백을 "조선 신자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천주교인들에게 찬미를 받아 마땅한 모범을 남겨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8년 9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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