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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 막달레나: 숨은 꽃이 내는 그리스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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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79

이 막달레나 - 숨은 꽃이 내는 그리스도의 향기

 

 

힘겹고 어려운 고통을 당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며 격려하고 그 고통의 의미를 기억한다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성원이 있음을 알면 그는 고통 중에서도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철저히 외면당한채 끝없는 고통 속에 버려진다면 누가 그 힘든 고통과 절망을 견디어낼 수 있겠는가.

 

우리 순교사에 소중하게 간직된 무명 순교자들은 바로 그 도통과 절망을 넘어선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독은 작은 무덤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 그들의 생애와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동요쳐 그 고결한 의로움을 잊지 않게 한다.

 

1827년 전라도 곡성 덕실마을에 조그마한 옹기점이 자리하였고, 이곳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위해 주막 하나가 있었다. 일꾼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으며 주막집 주인은 예비신자였다.

 

가마에서 옹기그릇을 꺼내는 날, 늘 그렇게 해왔듯이 동네 사람들이 모여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며 기쁨을 나누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이 술자리에 한백겸이라는 사람도 함께 있었는데 그는 순교자의 아들이었지만 성질이 포악하고 행실이 좋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고 "훌륭한 순교자에게서 어떻게 저런 못난 아들이 나올 수 있었던 말인가?" 하고 한탄하였다. 그날도 술이 몇 순배 돌아 술기운이 돌자 이 못난 사람이 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백겸은 자기 술잔이 너무 작다고 투덜거리면서 주막 주인과 옥신각신하다가 주막 주인의 아내에게 대들어 역을 퍼부으며 무지막지하게 손찌검까지 하였다. 신앙심이 아직 깊지 못한 주막 주인은 뜻밖의 모욕을 참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분한 마음에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가지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지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곡성관장을 찾아가 한백겸은 물론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교우들까지 고발하였다.

 

주막 주인의 고발을 받고 명백한 증거를 손에 넣은 곡성관장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포졸들을 보내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였다. 1827년 2월에 시작된 이 가슴 미어지는 일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포졸들의 횡포까지 더해져 참혹한 상황으로 확대되었다.

 

고발당한 신자들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누구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겼을 뿐 아니라 비좁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아직 신심이 깊지 못하여 마음이 약한 신자들의 입에서 새오나오는 고발이 더해져 박해는 전라도 전역으로 번지게 되었다. 전라도 전역이 박해의 도가니에 빠지자, 천주교 신자들은 살길을 찾아 헤매며 그들 앞에 내려질 운명을 기다리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도망가는 신자들이나 남아있는 이를 막론하고 아무도 포졸들의 횡포를 피할 수 없었고, 포졸들은 삼엄한 경계를 펴며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잡혀가지 않은 신자라 하더라도 철저하게 약탈당하여 먹을 것도, 가진 것도 없어 잡혀가지 않은 사실을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혹독한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배교하였고, 이 때 이들이 받은 문초의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다. 3월 한 달 동안 계속된 박해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교우들은 환난 속에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켰는데, 이들은 모두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때 전주감사는 이광문(李光文)이었는데 감사는 잡혀온 신자들을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다루었다. 그는 신앙을 고백하는 굳건한 사람한테 사형을 언도하지 않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료를 고발하지 않는 신자들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마땅히 사형에 처할 사정이 있어도 무한정 옥에 내버려두어 소리 없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게 하였다. 이 기묘한 방법은 결국 감사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성공하였다. 이 방법으로 신자들의 긴장은 풀리고 한없는 감옥생활의 무기력함과 소외감을 갖게 하여 전라도 지역은 가장 많은 배교자를 냈고, 또한 잊혀진 태 죽어가게 하여 주목할 만한 순교자를 아무도 남기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선도 보장되지 않은 비참함 속에 온전히 버려진 채 소외와 고독의 심연에서 신앙을 지켜낸 그 위대한 영혼들을 불행하게도 감사의 교활한 술책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몇 안 되는 소중한 이름만이 전해져 한국교회의 신앙유산으로 간직되었을 뿐이다.

 

그 가운데 성과 본명만 겨우 전해져 숨은 꽃처럼 살다가 순교한 여인이 바로 이 막달레나이다. 그녀는 초대교회의 온상이라 할 내포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씨는 신자로 이름이 알려진 이 바오로의 누이로서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여 신심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막달레나가 열일곱살이 되던 해에 교우인 이 안드레아에게 시집을 갔는데 주님께서는 이 혼인을 축복하시어 일곱 자녀를 내려주셨다. 그녀는 자녀를 정성껏 기르고 가르쳐서 훌륭한 신자로 키웠다. 특별한 재능이나 지식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한없는 자애와 성실로 모범을 보여 말보다 실천으로 자녀를 길렀다. 두드러지게 넉넉하거나 자랑할 것은 없어도 따뜻한 사랑 평화가 충만해 소박한 행복에 차있던 이 집안도 전라도 박해의 모진 바람에 휩쓸려갔다. 막달레나는 그 불행했던 박해 때 곡성에서 체포되어 광장 앞에 갔는데 관장은 막무가내로 그의 오라버니가 숨은 곳을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밀고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형제애를 저버리는 행위라는 걸 알고 있던 막달레나는 형벌을 꿋꿋이 참아 받으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관장은 이 여인에게서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어 전라감사가 쓰던 계략대로 귀양보냈다.

 

막달레나의 귀양자는 황해도 백천(白川)읍이었다. 여인으로 겪는 귀양살이의 고통과 돌아갈 기약 없이 아득한 외로움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차라리 옥에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매맞고 뜨거운 마음으로 격려하며 함께 기도할 수 있었으면 하고 참혹한 옥살이를 바라기도 했다. 헤어진 일곱 자녀의 생사도 알 길이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은 어디에서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꿈에도 그리던 혈육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몹시 그리웠다. 그녀는 다만 어떤 처지에서라도 주님 구원의 은총 속에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사무치는 고독을 견디어야 했다.

 

막달레나는 백천읍에서 새로운 시련을 맞았다. 그녀가 귀양지에 도착하자 주민들은 여인의 몸으로 귀양살이를 하게 된 동기를 알고 도와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외로운 여인의 처지를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희롱하고 비웃으며 귀찮게 하고 학대하였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쓰라림이었다.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모욕을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인고의 세월은 흐르고 그녀는 적막한 고독 속에 병들어갔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다가 죽어간 그녀의 4년을 알지 못한 다. 병이 깊어가던 어느 날 그녀는 묵주를 들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그 자세로 한없이 깨끗한 영혼을 주님께 바쳤다. 1830년 11월 12일 그녀의 나이 쉰세 살이었다. 숨은 꽃처럼 기도하며 살다가 죽은 그녀의 생애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향기'였다.

 

[경향잡지, 1998년 7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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