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2015-0403.....주님의 수난 성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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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4-03 ㅣ No.1742

주님의 수난 성금요일

이사 52,13-53,12       히브리 4,14-16; 5,7-9      요한 18,1-19,42

2015. 4. 3. 이태원

주제 : 참된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떠나게 돼 있는 것이 순리(順理)입니다. 다만 순리라는 말을 써도, 그 순리를 대하는 자세가 다를 것이기에, 순리를 불만 없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순리라는 것에 같은 자세가 아닌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두 가지 자세를 기준으로 여러분의 선택을 물으면, 여러분은 순리를 따르는 사람에 속하십니까 아니면 순리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의 삶에 다가오는 일에 대해서 대항하는 사람에 속하십니까?


제가 하는 이 질문에 여러분이 반드시 대답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쩌면 대답을 하지 않는 것도 다른 형식으로 하는 대답의 한 가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드러나는 표현이야 어찌 됐든, 이렇게 들려오는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대답은 필요할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드러나게 할 때, 다른 사람에게 그 표현을 얼마나 좋은 것으로 하느냐고 묻는 것이 대답의 목적은 아닙니다. 세상의 삶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라면 대답을 잘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먼저 필요한 것은 그 대답에 내 삶을 담는 자세입니다. 세상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내가 불만으로 대하면 그렇게 나쁘다고 여기는 것들이 내 삶에 결과를 남기는 일을 피해갈까요? 또 내게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일들이지만, 내가 그것을 칭찬하면 그 일이 다른 사람을 건너뛰어서 내게 먼저 달려오고, 나에게만 머무는 행복한 일이 가능할까요? 이론적인 입장에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여기고 싶겠지만, 그 일이 얼마나 가능한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성금요일입니다. 시간이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님은 오늘 오후3시를 기준으로해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피곤한 세상인간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들이라면서 이 시간에 예수님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힘겨운 일과 죽음이라는 고통을 대하는 예수님과 우리가 1시간이라도 함께 머문다는 뜻에서, 어젯밤10시부터 밤샘성체조배를 시작했고, 오늘 오후3시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참여하고 그 시간을 마쳤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참여했지만,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획을 바꿀 수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당신이 예고한 대로, 당신께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신 대로 영면(永眠,=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죽음을 일컫는 말)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그 일을 한 것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시간은 20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실 시간인 지금, 주님께서 보여주신 수난의 의미가 무엇이겠는지 되새기는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더더구나 자연의 생명을 말하는 천수(天壽)를 누린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죽음으로 세상의 삶을 마친 분이 보여준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를 끼치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길게 들은 수난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사가가 전한 수난기를 읽고 들으면서, 이런 질문에 대답을 찾는다면, 나는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하고 묻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읽고 함께 들은 요한복음사가가 전하는 수난기(受難記)는 죽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행동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살아있을 때 보여주신 삶,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지금 이 시간에 수난예절을 거행하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또 달리 표현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예절에 함께 참여하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수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런 내용이 하느님께서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을 막거나,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는 일을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올바른 사람, 예수님의 모습을 올바르게 대하는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는다는 것이고, 그가 세상에서 드러내는 모습에 그 효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사가가 전하는 수난기에는 예수님께서 맞이하신 시간동안, ‘어젯밤 해가 지고 최후만찬식사를 하신 다음부터 오늘 오후3시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감정의 혼란을 걷어내고, 철저하게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그 상황을 대하신 모습이기는 합니다만,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추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자세는 마지막 말씀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셨을까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혹시 예수님은 이 순간이 당신의 삶에 빨리 다가오기를 바라신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마음의 표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고난당하는 야훼하느님의 종의 노래, 네 번째가 그 사정을 정확하게 전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서 세우신 계획에 필요한 고통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이셨고,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그 일을 당신의 몸으로 실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서글픈 일입니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렇게 따른 본보기를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야하겠습니까?


나는 구원의 길로 가야하겠지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도 좋을까요? 예수님에 관한 이러한 일을 모두 아는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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