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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덕원의 순교자들11: 일데폰스 플뢰칭어 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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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의 순교자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평화신문 공동 기획] (11) 일데폰스 플뢰칭어 수사 뚝딱뚝딱, 명동성당 강론대에 숨결 넣은 주인공 ▲ 출생 : 1878년 7월 20일, 독일 타이딩 ▲ 세례명 : 안드레아스 ▲ 첫서원 : 1909년 10월10일 ▲ 한국 파견 : 1909년 11월 7일 ▲ 종신서원 : 1912년 11월 24일 ▲ 소임 : 수도원 목공소 책임자 ▲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11일, 덕원 수도원 ▲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2년 3월20일, 옥사덕 수용소 ▲ 그림=김형주(이멜다) 일데폰스 플뢰칭어 수사는 한국에 파견된 첫 번째 독일 선교사 그룹의 일원으로 1909년 12월에 입국해 43년간 이 땅에서 활동하다 순교했다. 수도원 목공 책임자였던 그의 흔적은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서울 명동 주교좌 성당 네오고딕식 강론대이다. 백동ㆍ덕원 수도원과 관할 모든 본당 및 학교 시설 대부분이 그의 손에 의해 지어졌을 만큼 플뢰칭어는 빼어난 장인이었다. 또 그는 항상 한국인이나 중국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공사장 움막에서 잠을 잤을 만큼 겸손하고 청빈한 수도자였다.
플뢰칭어는 1878년 7월 20일 독일 뮌헨-프라이징 교구 함가우에 있는 아메랑 읍의 작은 마을 타이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안드레아스. 아버지를 일찍 여윈 그는 어머니 안나 쿤처, 두 남매와 함께 외가에서 성장했다. 첫 서원식때 차비가 없어 가족 모두가 참석하지 못할 만큼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했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삼촌에게 목공을 배운 후 여러 도시를 돌며 기능과 견문을 넓혔다. 첫서원 후 곧바로 한국행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회복한 그는 1906년 여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했다. 일데폰스라는 수도명으로 1909년 10월 10일 첫서원을 한 그는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선발돼 그해 11월 7일 파견됐다. 1909년 12월 28일 5명의 선교사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그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 신부의 안내로 순교성지를 순례한 후 여장을 풀었다. 이날 플뢰칭거는 그의 여행기에 "영원 속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쁘게 고대하며, 우리의 남은 삶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바쳐 그분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힘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한국에서 그의 첫 임무는 벽돌로 수도원 목공소를 짓는 것이었다. 수도원이 완공되기 전 한국인을 위한 기술학교인 숭공학교 건물을 지은 그는 35명의 실습생을 가르치는 목공 선생으로 활동했다. 또 그가 만든 가구 등은 백동 수도원 재정 자립에 큰 도움을 줬다. "일데폰소 수사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건립 초창기부터 탁월한 능력으로 특히 어려운 전쟁 시기에 초인적인 인내와 끈기로 목공소를 이끌었다"(1921년 「백동 연대기」 중에서). 1912년 11월 24일 종신서원을 한 그는 원산본당 사제관과 해성학교, 문평학교, 청진성당, 중국 송화강 인근 가목사성당, 부금성당, 고원성당, 회령성당, 덕원 수도원 신학교 등 수도원 관할 선교 지역 여러 본당과 학교들을 건축했다. 1938년에는 간도 의란 카푸친 수도회를 위해 성당과 사제관 지어 '명예 카푸친 회원' 자격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그는 수도원 자금을 한 푼이라도 아껴 선교비로 충당하려고 거의 홀로 일했다. 고된 노동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그는 공사 중에도 꼬박 하루를 걸어 이웃 성당 미사에 참례할 만큼 기도생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올해로 나도 쉰 살을 넘어선다. 6년 후면 인생의 절반을 수도원에서 보낸 셈이 되지. 긴 세월이었지만 금방 흘러갔구나. 수도원에서 사는 것은 지루하지 않아. 늘 할 일이 있고 멋진 변화와 기도와 노동이 있기 때문이지. 또 죽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아무것도 잃을 게 없거든"(1929년 3월 31일 수녀원에 입회하는 조카딸에게 보낸 플뢰칭어 수사 편지 중에서). 그는 "대패질을 하면서 아이들 마음속에 신앙의 싹을 틔워 주었음이 분명하다"며 아이들이 작업장에 놀러 오는 것을 언제나 반겼다. 수용소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플뢰칭어 수사는 1949년 5월 덕원 수도원의 동료 수도자와 함께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로 수감됐다. 71세였던 그는 수감생활을 비교적 잘 견뎌냈다. 동료 수도자를 위해 이동 화덕도 만들고, 낫을 갈고 다른 봉사활동도 했다. 그러나 압록강 인근 만포ㆍ 청천을 거쳐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면서 뇌출혈을 일으킨 후 극도로 쇠약해졌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 누운 채 묵주기도만 하던 그는 1952년 3월 20일 추위와 영양실조로 순교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까지 이곳에서처럼 많이 굶어 본 적이 없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이, 제 나라를 떠나온 선교사의 가장 큰 고통이란다. 선교사는 많은 사람이 개종하고 미래와 영원을 위한 행운을 찾아 얻는다면, 기쁘게 제 나라를 떠나 온갖 궁핍을 감수할 것이다"(1929년 5월 22일 플뢰칭어 수사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평화신문, 2013년 8월 11일, 리길재 기자] 0 1,62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