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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의 대가들: 사도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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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09 ㅣ No.333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사도 바오로 (상)

 

 

1. 생애와 인품

 

사울이라고도 불리는 바오로는 히브리 전통을 충실히 고수하던 벤야민 지파의 유다인 집안 출신으로 길리기아의 다르소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부친의 상속으로 로마 시민권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것은 훗날 선교 활동하는데 유용한 것이었으며 특히 로마 황제에게 직접 상소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했다.

 

그는 당대의 명성 높던 랍비 가므리엘 1세 문하에서 히브리 교육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유학한다. 그곳에서 성서에 관한 정규 교육을 거쳤으며 바리사이파 교육 방침에 따라 토라를 철저히 익혔다. 또한 랍비 관습을 쫓아 육체 노동을 배워 실천하였다. 가죽 다루는 기술을 포함한 천막 짜는 기술을 배웠던 그는 사도가 된 후에도 신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몸소 일하며 필요한 것을 마련하였다.

 

예수님의 생애동안 바오로가 그분을 직접 상봉했다는 역사적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도행전은 그가 그리스도교와 첫 대면하던 장면을 예루살렘에서 스테파노의 순교의 피로 기록하고 있다(사도7, 54-8, 1 참조). 그가 당시에 얼마나 광신적 유다교인이었으며 반 그리스도교적 박해자였는지 스스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습니다. 아니, 아예 없애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갈라1, 13). 그의 박해 활동은 다마스커스까지 확장되어 갔다. 그가 그곳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일생 최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체험한 것이다. 그는 그 계기로 '그리스도께 사로잡힌'(필립3, 12) 사람이 되면서 전혀 다른 인생관, 신앙관을 갖게 되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위로부터 내려진 어떤 위협적 위력, 번개처럼 그를 땅에 내동댕이친 그런 물리적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사랑, 형언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의 발견이었다. 결국 박해자가 박해받는 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그 사랑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하면서(갈라 1, 18 참조) 만민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그는 세 차례의 선교 여행에서 온갖 곤경과 여러 차례의 죽음의 위기를 겪었으나 '이방인의 사도'라 불릴 만큼 성령이 이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

 

 

2. 영성사 안에서 바오로의 위치

 

오늘의 영성신학에서 영성은 '성삼위의 친교에 참여'이고, 영성생활이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성삼위의 신비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의 골격을 처음으로 형성한 이가 바오로이다(에페 2, 18; 2고린 13, 13 참조).

 

첫 복음서인 마르꼬 복음서가 기록되었을 무렵(약 70년경)은 바오로가 쓴 서간들이 널리 알려진 다음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에 관하여 최초로 글을 써서 파급한 이가 바오로인 셈이다. 다양한 교회 공동체들의 생활 현장에 깊이 개입하고 체험한 그는 그 현장을 직접 현실감 있게 증언해 준다. 복음사가들이 예수님의 역사적 과거의 사실을 증언하는데 비해 바오로는 새로 세워진 교회들 안에서 신령한 방법으로 현존하시면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즉 그는 복음사가들과 달리 성령을 통해 활동하시는 '교회의 예수님'을 증거한다. 우리는 바오로 안에서 다른 어느 그리스도인에게서 찾을 수 없는 뛰어난 창의성을 보게 된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복음적 토대를 다양한 사회 및 교회의 여건에 따른 문화와 생활의 구체적 정황에 접합시킬 줄 알았다. 따라서 그의 신학과 영성은 추상적이거나 비현실적 이론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인 생활에 생동감있게 대응하는 구체적인 답변이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한 위대한 회심자였다. 광신적 바리사이파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에 혹독한 박해까지 서슴치 않았던 그가 모든 정열을 쏟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복음 선포에 목숨 바쳐 헌신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성령의 놀라운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3. 바오로 영성

 

바오로의 서간 안에 나타나는 그의 신학과 영성은 심오하고 광범위하여 전반적으로 고찰하기란 어려운 일이기에 그의 영성의 일부 기본적 측면만을 살펴 보기로 한다.

 

3-1 성령 안에 새로워진 인간

 

바오로는 자주 '낡은 인간'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새로운 인간'을 대칭시키면서 그의 가르침을 전개해 나간다. 이것은 삶의 여정에서 겪은 체험으로서 그의 영성의 주요 기반이다. 이 세상의 타락은 역사 안에 죄를 일으킨 아담의 첫 범죄에서 그 근원을 갖는다. 이 악의 힘은 모든 이에게 죽음의 왕국을 펼친다(로마 5, 17-18 참조). 한편 생명의 원리와 근원은 새 아담, 부활한 그리스도이시다(1고린 16, 22 참조).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인간안에 성령의 현존은 그리스도와 존재론적 친밀관계를 이루도록 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그분과 공동 상속자가 되어 새로운 창조물이 된다.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를 입고 쇄신되어 그리스도의 삶을 함께 살고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신비체의 부분을 이룬다. 바오로의 서간에 자주 쓰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생활의 친밀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3-2 육과 영

 

바오로에 의하면 '육(flesh)'은 영혼(soul)에 반대되는 몸(body)이 아니다. '육'이라는 말은 '영(spirit)', '그리스도의 영', '하느님의 영'에 정반대 되는 것으로서 살아있는 몸이 아니라 생명의 숨결을 빼앗긴 존재로서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전제된다. 그것은 하느님과 원수지게 하는 그 무엇을 가르치고자 한다(로마8, 7-8). 

 

바오로는 영혼과 몸을 이분(二分)하는 희랍적 이원론 사고에는 관심이 없다. 유다교적인 사고의 사실 주의에 충실했던 그는 언제나 인간을 전체적으로 보았다. 그에게 몸이란 영성과 반대되는 인간 생명의 물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지 않는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인간 생명의 유기적 통합으로 여긴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몸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몸을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이라고 일컫는다.

 

한편 영은 초월적인 것으로서 하느님 생명의 살아있는 숨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으로 그리고 믿음과 세례로 그분과 맺는 일치의 결과로 주어지는 영은 인간 존재의 깊숙한 곳 인간의 삶 전체에 생기를 주며 그곳에 침투하고 일치하여 영적인 결실을 맺게 한다. 바오로에게 영은 인간이 살도록 불리는 총체적인 새로운 삶이다. 반면에 육은 그러한 신적인 영에 살지 않는 인간의 삶이다. 이 삶은 죽음을 피해 운명지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있는 죽음 자체이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바오로가 구별한 육과 영의 이중성을 희랍적 사고나 영지주의의 이원론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육이 인간의 육체적 본성과 공통적인 것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바오로는 드물기는 하지만 '육'이란 단어를 써야 할 곳에 유사한 의미로 '몸'이란 말을 사용하는 경우(로마 7, 24; 1고린 9, 27; 로마 8, 10∼11 참조)가 있기 때문이다.

 

3-3 율법과 은총

 

바오로는 율법과 성령 혹은 율법과 은총을 대칭시키며, 성령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아닌 은총의 지배를 받는 사람임을 강조한다(갈라 5, 18; 로마 6,14 참조).

 

바오로에 의하면 율법이란 십계명에서부터 옛 계약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광범위한 내용을 포함한다. 그는 인간이 그러한 율법을 수행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것을 반대하여 이렇게 선언한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 대전에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의화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갈라 2, 16)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안에서 은총에 의한 죄인의 의화는 단순히 외적, 법률적인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전가하는 것(imputation)도 아니다(로마 4장 참조). 그것은 인간이 성령에 의해 변화(transformation)되는 것이다(로마 5, 17∼21 참조).

 

율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이고(갈라 3, 24 참조), 율법의 목적이며 종점은 결국 그리스도(로마 10, 4 참조)이시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은총의 대립은 폐지가 아니라 완성으로서 초월성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가톨릭신문, 1999년 9월 19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사도 바오로 (하)

 

 

3-4 선교 영성

 

바오로는 하느님이 직접 부르신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 소명의식에 언제나 철저했고, 실로 그 사명 수행에 혼신을 기울이며 일생을 바쳤다. 한편 그에 앞서 하느님은 그에게 요청되는 적성과 카리스마를 태워주셨고 또한 맞갖은 자질을 키워주셨다.

 

3-4-1 적성, 자질

 

은총이 본성을 파괴하지 아니 하고 완성시킨다는 원리는 바오로 사도의 영성 여정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실로 은총은 그의 천부적 능력, 성향, 기질 그리고 감성을 희생시키지 아니하면서 잘못된 부분은 지배하고 예속시키며 좋은 것은 고무하고 거양하여 발전시켰다. 바오로의 총체적 인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천부적 재능, 기질과 함께 은총의 생활로 높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다혈질적이며 불같은 성격을 타고난 바오로가 유다교인이었을 때 광신적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활동한 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일 수 없었듯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면서 이번에는 어떠한 역경이나 박해 그리고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외치는(로마 8,35-39 참조) 열정적 사도가 된 것도 그의 성품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은 빗나간 방향에서 저항하던 바오로의 본성적 재능과 자질을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로 전환시켜 주셨던 것이다.

 

한편 그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시라는 진리를 확신하였기에, 모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하느님, 빛의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필요성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그는 교회의 건설(1고린 3,1-17 참조)과 공동 유익을 위해(1고린 12,7 참조)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1고린 12,11) 베풀어 주시는 카리스마들 중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 특히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선포가 그의 몫임을 절감했던 것이다(갈라 1,15-16 참조).

 

또한 그의 성장과정의 문화 배경과 교육 여건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 자질의 기초를 닦도록 하였다. 그리스 디아스포라(다르소)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주변의 지배적 상황인 그리스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성장했던 것이다. 그의 서간에서 자주 그러한 문화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로마 1,19; 2,27-3,8; 2고린 4,16-5,9; 1고린 9,24-27 등 참조). 또한 히브리 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 간 예루살렘에서 정규 성서교육 과정을 통해 익힌 그의 상당한 성서지식은 미래의 선교활동을 위해서 가장 유익한 기본갖춤이 되었다.

 

3-4-2 소명의식과 사명수행

 

다마스커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극적인 만남은 은총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회심의 정점이었지만, 교회 역사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전환점을 이루게 한다. 바오로는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사도로, 특히 이방인의 사도로 불렸음을 여러 차례 표명하면서(갈라 1,15-16; 로마 1,5; 사도 22,21 참조) 자신이 '사도'로 호칭되어야 함을 강력히 주장하고 열두 사도에게 유보되어 통용되던 사도의 사명에 관한 신학적 체계에 의의를 제기한다(1고린 15,9-11 참조). 이같이 자기의 입장과 이방인들에게 설교하는 합법적 권리 및 자유를 변호하던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두 번이나 사도들을 만나 결국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갈라 1,18; 2,9 참조).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다마스커스 사건 이후 본격적인 선교 활동하기 전까지의 아라비아 사막의 은거생활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본인의 서간에서 직접 술회한다. 학자들은 그가 그곳에서 은거한 기간을 약 3년 정도로 본다. 은거의 시간들은 그가 그리스도와 친교, 우의를 두터이 하면서 성령께로부터 주님의 사도로 양성되는 은총의 때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오로는 자신을 가르친 교사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갈라 1,11-12 참조). 그가 선교 활동 장소를 옮기는 것이나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이끌어 주신 분은 그리스도의 성령이셨으며 그는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다(사도 16,6-8 참조). 그러므로 그의 선교 활동은 기도와 통합되어 하나의 실재를 이루면서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도록 하였던 것이다. 바오로가 숱한 역경과 시련 그리고 혹독한 박해 중에도 복음선포 사명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16).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불가분의 두 진리를 사명 수행의 기본 척도로 삼았다. 하나는 그에게 선교사명을 맡기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 다른 하나는 체험을 통한 그의 신념 고백에서 나타난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립 4,13). 이것은 그가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부당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느끼는 이중적 자기의식이었다. 혹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것은 바로 바오로의 사도직 영성의 기초이며 핵심이었다.

 

3-5 완성 위한 인간의 협력으로서 수덕 

 

바오로는 인간의 의화와 성화가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인한 율법이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자주 강조한다. 실로 성성(성덕)은 그리스도인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선물이며 단순한 피조물인 인간을 천상적 존재로 들어 높이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은총이다. 본래 하느님만이 거룩하시지만, 그분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피조물은 거룩해질 수 있다. '거룩하신 분'(사도 3,14; 묵시 3,7)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을 믿는 이들과 성성을 나누며 그들을 성화시키신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세례성사를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1고린 1,30; 6,11 참조).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자주 그리스도인을 곧장 '성인'(성도)이라 지칭한다(2고린 1,1-2; 히브 3,1; 필립 1,1; 에페 5,3 등 참조).

 

이같이 그리스도인이 새로 태어나면서 받는 무상적 선물을 존재론적 성성이라 한다. 이러한 성성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협력하면서 구체적인 선행을 통해 더 높은 단계의 성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받기 위한 인간편의 협력으로서 체계적이고 항구한 노력을 제외시키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한편 은총은 그러한 노력을 가능하게 해준다(필립 2,12-13 참조). 그리고 그는 이렇게 가르친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처럼 살지 마십시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에페 4,17; 22,24). 이로 인해 성성은 이제 개별적인 것이며 은총에 대한 각자의 생활 자세에 따라 정도에 있어 다른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이를 일컬어 학자들은 윤리적 성성이라 한다.

 

성화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성장하면서 지향해야 할 목표는 완성적 성성 즉 완덕이다. '나는 이 희망을 다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필립 3,12. 15).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종이 된(로마 6,18-22 참조)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느님께 적극적으로 위탁하며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을 바오로는 운동선수의 신체단련과 연관시켜 수덕의 영성을 전개한다(1고린 9,27 참조). 그리고 그는 이러한 수덕의 자세를 경기장에서 우승하려는 운동선수의 훈련에 비교하여 설명한다(1고린 9,24-25 참조).

 

인간은 충만한 자기 완성을 하늘 나라에서 얻게 되는데 거기서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며 그분의 진선미를 영원히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 여정 중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성은 상대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인간이 은총에 협력하며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 나가지만 이 세상에선 은총에 대해 인간의 응답이 한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 [가톨릭신문, 1999년 10월 3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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