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김광옥 안드레아: 내일 정오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73

김광옥 안드레아 - 내일 정오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온 나라를 흽쓴 박해의 매섭고 차가운 칼날이 6월에 잠시 멈칫하더니, 형조에서는 7월에 또다시 사형선고를 내렸다. 1801년 음력 7월 17일 충청도의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 김정득(金丁得) 베드로, 전라도의 한정흠(韓正欽)스타니술라오,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김천애(金天愛) 안드레아 등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뒤 한국교회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장한 죽음으로 계속된다.

 

김광옥 안드레아(1741-1801년)는 내포 지방 예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훌륭한 자질을 타고나서 마을에서 오랫동안 관직을 맡아 관아에서 직책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워낙 성미가 급하고 과격한 편이어서 가끔 신경질을 부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무서워하였다.

 

그러던 그이가 50세가 될 무렵 내포의 사도라 불리우던 이존창(李存昌)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교우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광옥이 미관말직이나마 관직에 있고 또 과격한 성격을 아는 터라 모두 놀랐는데, 뜻밖에도 그는 매우 열심히 교우의 본분을 지키며 교리를 따랐다. 사순시기에는 금식과 절제로 극기하며, 사랑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천주교의 덕을 부지런히 배우고 실천하여 성격을 누그러뜨리고, 타고난 훌륭한 자질로 덕행을 쌓는데 성공하였다.

 

안드레아는 집안과 친구들 앞에서 드러나게 신앙생활을 하며, 교리를 설명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아침저녁으로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며 모든 사람한테 겸손되이 예의를 지키는 안드레아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양처럼 순한 어린이 같다며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1801년 우리 나라에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 그이는 마을에서 너무 잘 알려졌기에 공주 무성산으로 즉시 피신했다. 그러나 밀고자의 신고로 예산에서 나온 포졸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이는 포졸들에게 "내가 집에 앉아 기다린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을 것이요. 왜냐하면 내가 약한데 내 힘을 믿는 것 같았을 테니까 말이요. 그래서 몸을 피해 모면해야겠지만 마음속으로 순교를 가장 큰 소원으로 삼았오. 오늘 잡힌 것은 천주님의 뜻이니 매우 기쁘오" 하며 천상의 기쁨의 찬 모습을 흩뜨리지 않아 포졸들과 보는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관장은 김광옥 안드레아를 즉시 심문하여 공범자들과 천주교 서적을 내놓으라고 명하자, 안드레아는 "저와 신앙을 함께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천주교와 관련된 책으로 말씀드리자면 너무 소중한 것이기에 진리를 알고자 하는 뜻이 없으신 사또께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사또는 몹시 화기 나서 고문을 더욱 심하게 하였고, 안드레아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큰 칼에 씌어져 감옥에 갇히고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심문이 이어졌다.

 

김광옥을 치던 형리들의 매가 부숴지고, 치도곤을 맞은 김광옥의 뼈가 으스러졌지만 그는 용감하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사또, 어떤 회유나 위협도 소용없습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 임금의 명을 어길 생각이십니까? 저도 천주의 명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하느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의 은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마저 살펴보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감히 마음속으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주시는 놀랍고 두려운 초인적인 능력과 보호를 우리는 이 태산과 같이 굳은 증거자에게서 본다. 그에게 고문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당황하고 기가 막혀 다시 물었다. "아니, 도대체 너는 죽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 너는 아내와 자식이 있다. 네가 한마디만 하면 돌아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 터인데, 어째서 형벌을 받으려 고집하느냐?" 증거자는 대답했다. "삶과 죽음이 저에게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천주님을 배반하면서까지 그들과 함께 살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처한 처지가 다릅니다. 임금의 녹을 받는 사또께서는 그분의 명을 따라야 하고 저는 사또께서 그 명을 집행하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저는 매를 맞아 죽더라도 주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모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안드레아는 기쁨과 평화를 지닌 채 사형언도를 받고서 빛나는 얼굴로 자신이 받게 될 순교의 은혜를 기뻐하며 천주님과 동정 성모님께 감사드렸다. 또 그이는 이 천상의 기쁨과 평화를 옥중의 동료와 외교인들에게도 나누었으며, 큰 소리로 기도하며 교리를 힘차게 가르쳐, 듣고 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김광옥은 청주병영으로 이송되었다가 서울로 옮겨져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조정의 명으로 고향인 예산에서 처형당하게 되었다. 사형집행지인 예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역시 사형언도를 받고 대흥으로 가던 김대춘을 만났다. 영원한 영적 동지인 두 증거자는 길을 가는 동안 서로 격려하며 위로했다. 세속적으로 두 증거자의 겉모양만 본다면 그들은 참혹한 죄인의 모습이요, 참담한 죽음의 형장으로 가는 것이다.

 

순교의 길을 함께 가던 안드레아와 김대춘은 예산과 대홍의 갈림길에서 헤어져야 했다. 내일 정오에 김광옥은 예산에서, 김대춘은 대흥에서 참수(斬首)당하기로 되어있었다. "교우(敎友)여! 내일 정오에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그들은 사형이 집행될 날 정오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이들의 감동적인 약속은 주님만이 완성시켜 이루어지게 해주실 수 있다. 주님께서는 과연 그렇게 해주셨다.

 

비장한 감격에 잠긴 채 서로를 격려하며 약속을 다짐하고, 김광옥은 다음날 예산에서 일곱 달 동안의 옥고를 마감하는 순간을 맞았다. 그는 혹독한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해 들것에 실려 형장으로 운반되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의 기도'를 드렸다. 구경꾼들이 놀라며 "참 이상한 일이로군, 죽는 것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며 형장으로 가는 사람이 있네"라고 말했다. 안드레아는 이 말을 듣고 "그것은 내가 오늘 천주님 곁으로 가서 끝없는 복락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형장에 도착하고 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안드레아는 "내 기도를 마치지 못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치고 나서 스스로 사형대에 머리를 두고 몸을 숙였다. 그러나 망나니가 칼을 헛쳐서 어깨만 다치게 하였다. 그러자 김광옥은 벌떡 일어나 수건으로 피를 닦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조심해서 목을 단번에 자르도록 하게" 하고 더할 수 없이 침착한 모습으로 주님께 목숨을 바쳐 제헌하는 순교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김광옥 안드레아의 나이 60세였다.

 

이제 순교자들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죽인 사람도,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도 시대와 함께 역사 속으로 흘러갔지만 우리는 지금 왜 그들을 기억하며 이토록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일까. 그들은 참된 모습은 세속적인 겉모습과는 결코 다르다. 그들은 진리의 증거자이며 선각자요, 구원의 빛을 밝힌 참된 승리자들이었다. 이것이 증거자의 참모습이다. 진정한 영적 안목만이 이를 보고 깨닭게 한다. 이것이 시대와 역사를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는 까닭이라 하겠다.

 

[경향잡지, 1998년 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28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