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앙 실천의 선구자 홍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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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67

신앙 실천의 선구자 홍유한

 

 

무섭게 비바람이 몰아쳤다. 밤하늘을 찢어 놓는 섬광을 타고 천둥은 가슴속까지 흔들어대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초조한 마음으로 산모퉁이를 돌아가던 농부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밤새 몰아친 비바람에 산이 무너져내려 밭이고 논이고 흔적도 짐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농부의 가슴은 삶이 온통 무너져 내린 폐허를 보는 것 같았다. 비록 산자락 밭일망정 여생의 보금자리로 삼으려고 반평생을 절약해 산 것인데 허무하게도 산사태로 무너져버렸다. 농부는 삶이 조각난 허허로움에 망연자실하였다.

 

그때 농부에게 판 밭이 산사태로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밭값을 가지고 온 한 선비가 있었다. 농부는 그럴 수는 없다고 사양했지만 선비는 한사코 밭값을 되돌려주고 갔다. 세상에 이런 어른도 계시는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일찍이, 그 선비가 말을 타고 길을 가던 중에, 질퍽이는 빗길에 짐을 진 채 힘겹게 걷고 있는 노인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노인을 태워 백리 길을 걸어서 모셔다 드리고 돌아간 분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미 팔아버린 밭인데 산사태 로 무너졌다고 되물려주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농부의 가슴은 놀라움과 감사의 정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 재생의 은인은 뒤돌아봄도 없이 휘휘 사라져갔다. 농부는 눈물 고인 눈으로선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거듭 되뇌었다. 나도 저분처럼 살고 싶다.

 

이 선비가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한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이다, 명문가의 후예인 그는 8,9세 때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하여 신동이라 하였다.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조선인들의 전설로 소개하며 사량(士良);이라 불리기도 한 홍유한은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제자로 밝혀졌다.

 

홍유한은 16세기가 되던 해인 1742년 성호 이익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무렵 이익은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 서학을 연구하면서 천주교에 대해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는 보유론(補儒論)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때 홍유한은 그 문하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예리한 관찰력과 영민한 의지력으로 먼저 천주교의 계시진리를 발견했다. 그는 학문으로서 서학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서학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유학과 불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마음 깊이 새겼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새로운 삶을 살 것을 굳게 다지고 1757년 고향인 경상도 예산(禮山)으로 내려왔다. 구원의 진리를 얻은 홍유한은 신앙실천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괘념하지 않았다. 전례력도 없고 기도서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7일마다 주일이 온다는 것을 알고 매달 7월 14일 21일 28일에 모든 육신 일을 멈추고, 세속의 모든 것을 물리치며 기도에 전념하였다. 또한 금육일을 알 수가 없어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 한 가지는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그 까닭을 묻는 사람들에게는 다만 "본성의 탐욕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는 칠극에서 터득한 덕행을 그대로 살면서 육욕을 통제하여 30세 이후부터는 정절의 덕을 실천하였다. 그는 자비와 정의감이 투철했지만 희노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위엄을 지켰다.

 

홍유한은 이러한 신앙생활에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1775년 더욱 한가하고 고적한 곳을 찾아 경상도 순흥지방 소백사 구들미(현재 구구리)로 옮겼다. 이 적막한 곳에서 더욱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며 묵상과 기도에 깊이 잠긴 만년을 보내다가 1785년 1월 30이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에 단 한 분의 사제도 만나본 적이 없다. 따라서 단 한 번의 미사, 성사, 강론을 듣거나 참례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학문에서 신앙으로 전환한 첫 신앙인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경향잡지, 1997년 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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