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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홍낙민 루가 - 몇 차례 배교 끝에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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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64

신유박해 순교자들 (3) 홍낙민 루가


몇 차례 배교 끝에 회개

 

 

가두선교의 효시라 할 최필공이 1801년 2월 26일(음) 서소문 밖에서 "보배로운 피"를 외치며 순교할 때 정약종, 혹낙민, 최창현, 이승훈 등이 함께 참수당했다.

 

이제 이들 순교형장의 신앙동지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홍낙민(洪樂敏, 1740∼1801)루가는 충청도 예산 사람으로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서울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그가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이승훈, 정약용 등과 교분을 맺고 가까이 지내면서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여 세례명을 루가라 했다. 이 때가 바로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복음선포가 시작되던 무렵인 1784년 경이였는데 그는 초대 교회에서 교리에 밝은 교우로 알려졌다.

 

그러나 1791년 전산사건 당시 그는 정조(正祖)의 강압에 굴복하여 배교했다. 교리에 밝다던 그의 배교는 다른 교우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홍낙민은 첫 번째 배교를 곧 뉘우치고 묵주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고 엄격히 대소재를 지켰다.

 

이 회개의 생활이 탄로가 나 그는 1795년 다시 체포되어 15일간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그는 또 다시 나약함을 보였다. 이어 1797년에 정조께 천주교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임금으로부터 보고 내용이 분명치 못해 태도가 모호하다는 책망을 듣고 거듭 나약함에 빠져 천주교를 모함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가혹하게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승하하고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천주교인에게 억울죄를 적용하여 체포토록 했을 때 홍낙민도 다시 체포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천주교를 배반하였으므로 의금부에서는 그를 살려주고 매질하여 꾸짖고 귀양보내기로 했다. 그는 관례에 따라 귀양보내기 전에 우선 다리에 매를 맞았다.

 

그런데 이 매를 맞는 동안 그는 기묘한 심정으로 그 사이 몇 차례 주를 배반했던 것에 대한 뉘우침과 이제는 더 이상 목숨을 구걸하여 비겁하게 주를 배반할 수 없다는 강한 신앙에의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심약해 배교를 거듭하기는 했어도 열심히 묵주기도하며 통회했던 그를 주님께서 고문당하는 순간에 자비로이 이끄셨던 것일까. 홍낙민 그는 이제 더는 나약한 자가 아니었다. 선혈이 낭자한 형장에서 머리를 들고 관리들에게 말했다.

 

"제가 지난날에 한 모든 것들은 목숨을 비겁하게 보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또 매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니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감하게 죽고자 합니다. 제가 섬기는 천주님은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의 주재자이십니다. 이마두(마태오 릿지)신부와 다른 선교사들은 우러러 볼만한 도리와 성덕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천주를 위하여 죽고, 그렇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재판을 주재하던 정승들은 홍낙민의 굳건한 신앙고백에 경악하고 또 격노했다. 모여있던 사람들도 모두 이 용맹한 증거앞에 놀라워하며 서로 웅성거렸다.

 

이 사살이 곧 대왕대비 김씨에게 급히 보고되었다. 대왕대비는 나약해 보였던 홍낙민의 놀라운 반증에 몹시 노여워하며, 그에게 더욱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배교하게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가혹한 매질로 홍낙민 루가의 몸은 으스러졌다. 피투성이로 의식을 잃은 그를 옥으로 끌고 가 더러운 멍석바닥에 던져 놓았다. 한참이나 뒤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상처마다 흐르는 피를 보았다. 그는 손으로 온 몸에 흐르는 피를 씻으며 "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배반을 속죄하는 피로 보답하려는 그의 철저한 심정을 주님께서 자비로이 받아주시고 어여삐 축복해 주신 영적 평화와 행복을 그는 그렇게 체험하였으니라!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결안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홍낙민 루가는 ’죽음을 자기의 이전의 배교에 대한 별로 기꺼이 당하고자 한다.’고.

 

마침내 그가 그의 영원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서소문 밖 죽음의 형장으로 가기 위하여 수례에 올랐을 때 그의 얼굴은 기쁨에 빛났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형장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천주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권고하기를 마지않았다. 순교의 동지 정약종이 형장에서 감동적인 마지막 강설(講說)을 할 때 그는 크게 찬동하며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시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하고 외쳤다. 그는 이렇게 51세로 참수 순교하여 생을 마쳤다. 

 

이런 사실을 기록하여 남겨준 그 시대의 증언자들은 "배교하였다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보통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단언하는 바에 의하면 홍낙민 루가는 매일 묵주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공무를 집행하는 중에도, 그의 집에 많이 찾아오는 손님과 친구들 가운데서도, 그는 묵주기도를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한다. 아마도 이(묵주기도를 통한 성모)신심의 실천이 글에게 그다지도 비상한 은총을 받게 해 주셨을 것이다"라고 전해주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18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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