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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참수 순교자 최필공 토마스 - 가두 선교의 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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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63

신유박해 순교자들 (2) 참수 순교자 최필공


가두 선교의 효시이며 보배로운 피의 순교자

 

 

1800년 음력 6월 28일 정조(正祖)가 재위 24년만에 승하하였다. 천주교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펴던 그의 죽음은 천주교와 남인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純祖)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궁중의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攝政)이 되어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게 되었다.

 

대왕대비는 원래 노론 벽파에 속해, 정권을 잡자마자 반대파인 남인 시파와 천주교 신자들을 물리치려했다. 장례예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그녀는 11월 하순에 시파 사람들을 몰아내고 벽파 사람으로 채웠다. 그러자 이어 천주교를 박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해 12월 17일(음) 최필공이 다시 체포되는 것을 신호로 삼아 최필제와 오현달 등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당해, 불안하던 염려는 마침내 1801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의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현실로 변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된 신유박해는 한국초대교회 거의 모든 지도자들을 순교나 귀양으로 상실하게 하였다. 이제 이 박해때의 순교자들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최필공(崔必恭, 토마스, 1745∼1801)은 서울의 중인계급으로 궁중 의관(醫官)집안출신이었다. 최필공이 벼슬을 얻지 못하자 몹시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는 너무 가난하여 나이가 찼으나 혼인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솔직하고 너그러운 그의 성격이 천성적으로 착하고 진실되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신뢰를 받았다. 

 

1790년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그는 입교하는 날부터 크나큰 열성으로 영혼 구원의 일만 생각하여 육신에 대해서는 필요한 것을 돌보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때가 많았다. 그의 열정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면서 두려움도 없이 천주교를 공공연히 전파하였다.

 

그는 때때로 한 길 가운데 군중속에 멈추어 서서 "천지의 큰 임금을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주를 어찌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외쳤다. 그는 아마도 우리 나라 가두선교의 효시로 일컬어도 좋을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 무렵 그의 열성은 비록 그가 새로 입교한 신자이기는 해도 가장 열심한 신자 중의 하나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791년 신해박해로 용감한 가두선교자 최필공은 형조에 끌려가 모진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천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천주께 대한 본분을 다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고 용감하게 대답한 뒤에 그에게 가해지는 어떤 형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신앙고백을 되풀이하여 마지않았는데 어떻게나 순진하고 솔직하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하였던지 보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의 순진 무구한 확신은 마침내 정조 임금께 알려지고 정조는 최필공의 목숨을 보존하여주고자 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그를 회유하여 몇 마디 굴복한 말만이라도 얻어내도록 하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형조에서는 갖은 유혹으로 그를 회유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조는 마지막으로 최필공의 옥에 낡은 숙부와 동생을 들여보내 눈물로 간청하여 이 용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했다. 최필공은 사람으로서 만가지 회포와 감개에 복바쳐 가슴 메이는 슬픔을 느꼈다. 그 쓰라린 고통 가운데서 우리의 증거자는 참혹하게 울면서도 참 임금이시오, 참 아버지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단호히 그의 태도를 밝혔다.

 

형리들은 이제 오직 준엄한 사형판결 선고만 남았음을 알면서도, 정조의 의도와 그들 자신마저 저 용감한 최필공의 자세에 감복하여 최필공이 임금의 뜻에 순종한 것처럼 했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정조는 최필공의 목숨을 보존하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곧 그에게 의관의 집안에서 얻을 수 있을 좋은 자리를 주게 하고 집을 마련해 주며 장가도 들게 해주었다. 그러고도 정조는 거듭 최필공이 굴복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최필공이 이 세상에서 누린 세속적인 행복은 이 짧은 기간이 전부였다. 그는 비록 거짓이라도 배교의 대가로 얻은 세속적 복락에 대해 이내 무섭게 회개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이로 인해 그는 1799년 다시 형조에 불려가 신문을 받고 이번에는 정조 앞에서 천주교가 참된 진리임을 웅변하였다.

 

정조는 극형을 주장하는 형조의 요청을 무시하고 그를 석방시켜주었다. 최필공의 순진 무구한 신앙고백은 그렇게 정조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최필공이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는 1801년 2월 26일(음) 정약종, 이승훈등 다섯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으로 갔다. 망나니는 아직 경험이 적어 그의 목을 단번에 치지 못했다. 첫 번째 칼에 상처만 났다. 최필공은 조용히 손을 들어 자기 상처를 갖다댔다, 피가 흥건히 젖은 손을 떼어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외쳤다. "보배로운 피!" 과연 그 피는 보배로웠다. 그 피는 순교의 피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씨앗이 되는 피였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11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최필공 토마스 - ’보배로운 피’의 증거자

 

 

서울의 중인 계급 출신 최필공(1745-1801년)의 집안은 궁중의 의관(醫官)이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뜻이 굳세며 의로웠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뛰어난 풍모를 지녔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대에 와서 벼슬을 얻지 못하여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너무 가난하여 나이가 찼으나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솔직하고 너그러운 성격 탓에 사람들에게 호감과 신뢰를 받았다.

 

1790년,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곧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입교하는 날부터 열성으로 영혼 구원에만 마음을 쓰고, 육신을 돌보는 일에는 꼭 필요한 것조차 잊는 때가 많았다. 그의 신앙적 열정은 시간이 흘러도 식지 않고 오리혀 깊어져 두려움을 모르는 듯 천주교를 공공연히 전파하였다. 그는 한길 가운데 서서 "천지의 큰 임금님을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주님을 어찌 섬기지 않겠습니까?" 하고 외치기도 하였다. 아마도 우리 나라 가두 선교의 효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가장 열심한 신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길거리와 군중 속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던 최필공은 그의 입교 사실과 열렬한 신앙생활로 관헌의 눈을 피할 수 없게 되어,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형조에 끌려가게 되었다. 형조에서 모진 심문을 받으면서도 이 최초의 가두 선교자는 "사람은 누구나 천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천주께 대한 본분을 다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고 용감하게 자신의 신앙 결의를 밝혔다. 그리고 어떤 형벌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최필공은 거듭되는 심문과 형벌에도 한결같은 목소리로 끝없이 신앙고백을 되풀이하였는데, 얼마나 순진하고 솔직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하던지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런 그의 모습은 마침내 정조에게 알려지고 정조는 최필공의 목숨을 보존해 주려고 하였다. 정조는 그를 회유하여 몇 마디 굴복하는 말이라도 얻어내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형조에서는 갖은 유혹으로 그를 회유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늙은 부친과 형을 감옥으로 불러와 눈물과 간청으로 마음을 움직여보려 했다. 최필공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격정과 슬픔으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참 임금이시고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나는 결코 배반할 수 없소!" 하고 단호하게 그의 태도를 밝혔다.

 

최필공을 회유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마저 실패하자 형리들은 오직 사형 판결만이 남았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형리들은 임금의 뜻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 자신도 그의 의연한 자세에 감동하면서 깊은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

 

형리들은 임금에게 최필공이 회유되었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그러자 정조는 그가 마음을 돌린 것을 크게 기뻐하면서 그에게 의관의 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벼슬을 내리게 하고, 집을 마련해 주었으며 결혼도 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최필공이 임금의 은혜로 이 세상에서 누린 세속의 행복은 이 짧은 기간이 전부였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비록 거짓일지라도 배교의 대가로 세속의 복락을 얻은 것을 회개하였다. 사실 최필공이 실제로 심문의 고통을 이기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가 형리들이 임금에게 아뢴 거짓말들에 대해 강력하게 항변하지 못한 심약한 마음을 가졌던 것인지, 어떻게 해서 그가 회유되었다는 보고가 임금에게 전해졌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필공이 자신의 죄(거짓으로 배교를 통해 얻은 세속의 행복)를 몹시 슬퍼하였고 신자로서 열성을 되찾아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신앙의 본분을 지켜나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1799년 다시 형조에 불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정조가 친히 심문한 적이 있었는데, 뒷날 순교자 신태보가 편지에서 소개한 기록 가운데 한 대목을 보면 이렇다.

 

"국왕 : 나도 천주교 서적을 읽어보았다만 네 생각에는 그 도를 불도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으냐?

 

교우 :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불교와 비교해서는 안되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하느님의 은혜로 생겨났사옵고 보존되는 것도 또한 한가지이며, 다른 은혜 곧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위대하시며, 우주의 아버지이시며 주재자이신 그 천주의 강생구속만 이루어지는 것이옵니다. 아무 뜻도 없고 원리도 없는 도를 어떻게 감히 이 종교와 비교하겠습니까? 여기에는 참된 결과와 참된 지식이 있나이다.

 

국왕 : 그러나 네가 만물의 지극히 착하고 위대한 주재자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내려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더구나 약한 자들에게서 모욕적인 죽음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었단 말이냐? 그것은 믿기가 매우 어렵다.

 

교우 : 중국 역사를 읽어보면 탕 임금이 온 백성이 7년 가뭄으로 죽게 된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손톱을 깎고 머리를 자르고 초석을 두른 다음 빈 들로 나가 울며 고행하면서 기도를 바쳤는데, 그 기도가 끝나려면 충족한 비가 이천 리나 넘는 지역에 내렸다고 합니다. 그대부터 백성들은 임금을 성왕이라 불렀사옵니다. 그러하온데 구속의 은혜는 얼마나 더 크옵니까? 예전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미래 사람이나 모든 백성과 세상 만물이 이 구속에 젖어있사옵고 그것만으로 보존되나이다. 전하, 그러므로 전하께옵서 그것을 믿기 어렵다고 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나이다….

 

그런 다음 임금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그 교우를 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형조와 대신들이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진리는 스스로 지탱되는 것이니 매사가 마침내는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더 두고 보자" 하면서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 재위 24년만에 죽자 최필공 토마스는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그리고 정조 이후 조정의 권력 변화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 1800년 음력 12월 17일에 체포된 최필공은 옥에서 만난 신앙의 동지들, 정약종, 이승훈 등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1801년 음력 2월 26일(양력 4월 8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렇게도 곧은 성격과 고귀한 진실성으로 정조 임금도 감동시킨 그는 형장에서도 바르고 의연했다. 망나니는 최필공의 당당한 모습에 질려 목을 치면서 단번에 끝내지 못해 첫 번째 내리친 칼에는 상처만 나고 말았다. 최필공은 조용히 손을 들어 자시 성처에 갖다 댔다가 피가 흥건히 젖은 손을 다시 떼어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서 외쳤다. "보배로운 피!" 과연 그 피는 순교의 피요, 그를 구원한 승리의 피였다. 또한 천국에 이르는 문을 여는 피요, 하느님을 증거하는 피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씨앗이 되는 보배로운 피였다. [경향잡지, 1999년 7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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