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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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53

신유박해 순교자들 (22)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순교


신자들 박해 덜어주려 중국행, 국경 앞두고 돌아와 군문효수

 

 

급히 피신한 주문모 신부는 여회장 강완숙의 경탄할 협력을 받아 순교할 때까지 약 6년간 사목활동을 하게 되었다. 주신부는 언어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고 조선 풍속에 익숙하게 되자 지방을 조심스럽게 순회하며 사목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활동은 감시망을 피하고 밀고를 당하지 않도록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신부의 지극히 제한된 모든 일정은 강완숙 만이 알고 가장 확실한 교우들과의 접촉마저 삼가야 했다. 이로 인해 열심한 신자들이 신부를 뵙고 성사를 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례들을 무수히 남겼다. 이러한 여건에서도 신부가 오기 전 4천명이었던 신자 수가 1만명에 이르는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끊임없는 열성과 뛰어난 재능 그리고 놀라운 덕행으로 조선교회에 봉사했다. 당대의 신자들은 "주문모 신부는 일에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정도였다. 밤에는 성직을 행하고 낮에는 책을 번역하거나 새로운 책을 지었다. 그는 자주 금식과 극기를 행하고 자기 본분에 온전히 헌신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신부는 신자들의 악습을 엄하게 그러나 지혜롭게 꾸짖어 개선하도록 지도하고, 신자들의 올바른 신심생활을 위하여 '사순절과 부활시기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신자들이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준비를 할 때 갖추어야 할 마음의 자세에 대해 설명한 신심서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주문모 신부는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을 사랑했다. 그가 한양에 머물고 있을 때에 창골에서 화제가 나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큰 피해가 나고 있었다. 신부는 이를 가슴아프게 느껴 자신이 현장에 갈 수 없는 처지에서 송필립보의 아들을 대신 보내 불길에 성수를 뿌리고 오도록 하였다. 젊은이가 성수를 뿌리러 간 동안 신부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젊은이가 성수를 뿌리자 기이하게도 즉시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주문모 신부는 무서운 위험 속에서 지방순회 사목도 행했다. 여주의 윤유일, 전주 초남이의 유항검, 연산의 이보현, 양근의 권상문 등의 집과 고산, 공주, 온양, 내포지방에 들렀었다. 그러나 박해시기 사제의 안전을 위해 엄중한 비밀로 행해져 많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는 또 북경에서 가졌던 모임을 본떠서 한국 최초의 평신도사도직 단체인 명도회를 창설하여 천주교 교리지식을 배우고 또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주신부는 이 집회를 무게 있고 절도 있게 조절하였으며 그의 열성에 감화되어 회원들이 서둘러 모여들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교회 사목결과 보고와 조선조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어 안전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실현시키기 위해 북경교회와 연락을 계속했다. 이때 주신부의 편지를 북경교회에 전하는 밀사의 역할을 황심과 옥천희가 믿음직하게 수행했다. 이들 편지 중에는 포르투갈 왕에게 대선박 사절단의 파견을 요청하여 조선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이 국교를 체결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도 있다. 당시 상황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어보려는 주신부와 조선교회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이는 전혀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주문모 신부는 조심성과 재능, 열성과 덕행으로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사목활동을 전개했으나 교활한 자들의 끊임없는 밀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냉담교우 김여삼은 개인적인 물욕과 어이없는 증오심으로 신부를 포청에 고발했다. 밀고자는 이때 관직과 보수를 보장받고 신부의 은신처를 안내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김여삼이 여행중 병이 들어 관리와 만나지 못해 이 밀고음모는 다행히 실패했다. 밀고와 감시를 피해 위험을 겨우 면해가던 무렵 마침내 정순왕후 김대비의 박해령이 내려지자 천주교 신자들을 본격적으로 색출하여 체포구금하고 형벌을 가하였고, 수많은 신자들이 특히 주문모 신부의 은신처를 추궁 받으며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받고 희생되는 것을 보고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가 중국으로 돌아가고 없으면 교우들이 자기 때문에 추궁 받는 희생은 없을 것이고 어쩌면 박해도 중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밀고를 피해 경희궁에 이틀을 숨었던 주신부는 귀국 길에 올라 조심스레 혼자서 의주까지 갔다. 압록강만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그의 고국 땅이요 죽음도 피할 수 있는 고향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한순간 착한 목자로서 그는 하느님 은총의 은밀한 계시를 느꼈다. 목자는 양떼와 운명을 함께 한다. 양떼는 목자를 위해 죽음으로 안전을 지켰는데 목자가 어찌 강을 건너 목숨을 구하리요! 그는 한양으로 돌아와 "내가 당신들이 사방에서 헛되이 찾는 그 신부요!"하고 관아에서 신분을 밝히고 자헌하였다.

 

1801년 4월 19일(음) 조정은 격론 끝에 주문모 신부의 군문효수형을 집행했다. 그 순간 청명하던 하늘에 무서운 선풍이 일고 거듭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모두가 이를 보고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구나!"하며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2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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