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주문모 신부의 사목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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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52

신유박해 순교자들 (21) 주문모 신부의 사목활동


지황 윤유일 등 순교로 6년 간 사목활동 가능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시작된 한국교회가 박해와 빈곤의 난관을 무릅쓰고 10년 만에 사제를 모셔와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생활을 하게된 감격과 환희는 한영익의 밀고로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한영익이란 진사는 신부가 있는 곳에 인도되어 신부를 면회하고는 밀고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천주교를 공공연히 반대하고 조정에서 신임을 받고 있던 이벽의 동생을 찾아갔다. 이로서 의정부와 국왕인 정조까지 사실을 알게되고 체포령이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내려졌다.

 

다행히 배신자를 경계하여 행동을 염탐하던 교우들이 밀고사실과 조정의 체포령을 미리 알고 전해 주었다. 주문모 신부는 다급한 상황에서 우선 당시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최인길 회장이 혼자 남아 이제 곧 포졸들이 들이닥칠 집을 지키고 있었다. 최인길 회장은 이때 도망쳐 충분히 살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졸의 추적을 지연시켜 신부가 완전히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신부행세를 해 대신 잡혀갈 결심을 하였다.

 

최인길(1764~1795, 마티아) 회장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알았으므로 신부행세가 가능했다. 그는 일찍이 교회 초창기에 김범우의 집에서 권일신, 정약용, 이벽 등과 함께 집회에 참여했다. 추조에 의해 적발되었을 때 이벽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사제영입을 위해 윤유일, 최창현, 지황 등과 힘을 모아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주신부가 입국하자 신부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였는데 이제 신부가 밀고 당하여 위험에 처했을 때 사제의 안전을 위해 대신 죽을 각오로 임하고 있다.

 

그는 중국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변장한 체 포졸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포졸은 집을 포위하고 다가와 물었다. "중국인이 어디에 있느냐?" "나요"하고 최인길 회장이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는 곧 포장 앞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는 곧 착각한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신부는 수염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최인길 회장은 그렇지 않았다. 포청에서는 매우 원통하게 생각하며 다시 신부를 찾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신부를 모셔들인 다른 두 사람인 윤유일(1760~1795, 바오로)과 지황(?~1795, 사바)도 체포되어 최인길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신부를 모셔온 경위와 숨은 곳을 대라는 강요를 받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굳은 결심과 놀랍고도 지혜로운 응답은 신문관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오직 명백하고 용감한 신앙고백이 사제의 숨은 곳을 말하라는 심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었다. 여러 차례의 고문과 형벌이 가해지고, 매를 몹시 맞아 팔과 다리가 뒤틀리고, 손바닥을 제외한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무릎을 으스러뜨렸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들의 의지와 인내를 꺽지 못했고 사제에게 위험이 될 어떤 자백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은 오히려 이 고통 속에서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마침내 이들은 장살형으로 옥안에서 매맞아 죽음으로써 장한 순교의 영예를 얻었다. 참혹한 이들의 시신은 강에 던져져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양)이었으며 지황 사바는 29세쯤, 윤유일 바오로는 36세, 최인길 마티아는 31세였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부를 맞아들였으며 신부의 안전을 위해 비참하게 매맞아 죽임 당하고 시신마저 강물에 던져진 이들의 순교는 세속적으로 보면 참혹한 불행으로 보이지만 한국교회가 존재하는 한 이들의 모범과 영웅적 승리는 기억될 것이다. 이들의 순교로 주문모 신부는 이후 강완숙의 경탄할 협조를 받아 1801년 순교할 때까지 6년 간의 사목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들이 비록 신유박해 순교자는 아니지만 이들이 남긴 위대한 신앙적 유산을 신유박해 순교자요 첫 사목사제인 주문모 신부와 함께 기억하지 않을 수 없어 간략히 밝혀 두고 가려 한 것이다.

 

사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순교 사실을 접한 북경교회의 구베아 주교는 1797년 이들 세 순교자에 대해 이렇게 간절한 회고와 찬사를 남겼다. "북경교회와 나는 윤유일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을 내왕한 두 번의 여행에서 보여 준 신심과 정성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는 북경에서 고해와 성체성사를 하도 놀라운 열심으로 임하여, 우리 교우들 중 여러 사람이 이 신입교우에게서 복음실천에 통달한 오랜 교우와 같은 모범적인 겸손과 말과 덕행을 봄으로써 느낀 기쁨과 감탄 속에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1793년에는 지황 사바가 북경에서 지낸 40일 동안 그의 신심도 목도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신자들은 그가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을 때에 보여 준 그의 정성과 크나큰 열심과 감격해 흘리는 눈물을 보고 많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최인길에 관하여는 그가 북경에 온 일이 없기에 눈으로 볼 수 없었으나, 이 교우가 최초의 회장들 중 하나였다는 것과 그의 열심과 신심과 하느님의 영광을 전파한데 보여 준 열성이 뛰어났다는 말을 조선교회를 통해 들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5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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