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주문모 신부의 입국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51

신유박해 순교자들 (20) 주문모 신부의 입국


가난했지만 총명하고 성실, 부인과 사별 후 신학교 입학

 

 

한국에서 복음선교의 시작이 되는 1784년 명례방 김범우 선생 댁의 집회는 바로 그 이듬해 형조의 나졸에 의해 발각되어 집회는 해산되고 집주인인 김범우는 형조에서 매맞은 상처가 덧나 귀양지에서 선종하여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을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하는데, 1785년 이 사건 이후 권일신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재건운동 과정에서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교계체계와 성사집행을 모방하여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유항검 등 10여명의 지도자들이 스스로 신부 역할을 맡아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고해성사 등을 집행했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복음선교가 시작된 한국교회는 역시 세계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이 이렇게 평신도들에 의해 임시성사가 집행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이들은 대단히 성실하고 정성을 다한 자세로 전례와 성사를 집행했다. 초창기 교리지식이 부족하여 시작된 이 임시성사 집행은 차츰 교리공부를 하면서 전례와 성사는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가 집행하는 것이며 또 사제들은 순결을 서원하여 독신생활을 한다는 대목을 읽고, 자신들의 행위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북경주교께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가지고 갔던 윤유일은 북경주교의 친서를 받아 왔는데, 한국에서의 새교회가 시작된 것을 기뻐했으나 교계제 모방과 평신도의 성사집행은 엄격히 금지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에 그들이 행한 성사집행이 교회법에 어긋남을 알고 즉시 중단했다. 한국 초대교회는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비로소 사제의 필요성을 깨닫고 북경주교께 사제를 청원하는 사제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국 평신도들이 사제파견을 간청하는 서신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과 감격에 휩싸이게 하였다. 1790년 10월 6일자로 발송한 이 첫 사제파견 청원서를 본 북경주교는 이를 교황청에 전하였고, 교황 비오 6세는 크게 감동하시며 북경주교의 보호를 특별히 명하였다. 이에 북경주교는 1791년 2월 마카오교구 소속의 요한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신부와 조선교회의 연락교우가 만나지 못해 신부의 입국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제를 간절히 청원했던 조선교회는 사제를 맞아들이지 못한 체 1791년 '진산사건'이라고 알려진 박해를 받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 박해로 인하여 한국교회 지도층은 양반지식인층에서 완전히 중인계급의 지도자로 바뀌었다. 이때 교회의 새지도자로 최창현, 최인길, 지황, 강완숙 등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박해 속에서 재정난과 사제영입의 삼중적 고통을 겪으면서 각기 어려운 임무를 분담하여 북경에 다시 사제파견을 간청하였다. 북경의 구베아주교는 조선교회의 참상을 이해하고 박해 속에서 사목의 가능성이 높도록 조선인과 비슷한 모습을 지닌 중국인 신부 주문모 야고보를 선정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다.

 

주문모(1752~1801) 신부는 그 무렵 유행하던 방식에 따라 '벨로조'라는 포르투갈식 이름도 가졌는데 중국의 소주 곤산현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소년 주문모는 어렵게 자랐지만 총명하고 성실하여 칭찬을 받으며 글을 읽고, 과거를 준비했으나 잇달아 낙방했다. 20세가 되어 결혼하였으나 3년 만에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 혼자 살게 되었다. 그의 청년기 이 기이한 인생의 도정은 독특한 체험으로 생에 대한 회의와 정신적 편력을 하게 했지만 장년기에 들어설 무렵 천주교를 알고 안정을 얻어 북경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1793년 조선 입국에 실패하고 병사한 레메디오스 신부의 뒤를 이어 선교사로 임명된 주문모 신부는 그 사도직 수행을 위한 일반적 권한과 비상권한을 모두 받아 가지고 1794년 2월 북경을 떠나 20일 만에 조선 국경에 다다랐다.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1794년 12월 23일 윤유일과 지황의 안내를 받으며 머리를 조선식으로 꾸미고 옷을 갈아입어 조선인처럼 변장하고 강을 건넜다. 1795년 정월에 서울에 도착한 신부일행은 그 무렵 박해 속에 고난을 겪던 조선신자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교우들은 신부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맞아들였다. 신부 또한 극진한 교우들의 환영을 받고 '뒷날 내가 만약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들 이같은 환영을 받을 수 있을까'하며 그때를 회고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 마티아 회장이 마련한 북촌의 계동에 머물렀다. 그는 미사성제를 드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시키고 빨리 성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조선말 공부에 전력하였다. 그 해 성토요일 세례를 주고 또 보례를 행하였으며 몇몇의 선비에게는 한문으로 써서 고해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평신도들의 성사생활에 대한 열정과 사목자의 성직수행에 대한 사목적 열의가 한데 어울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초대교회의 불꽃같은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란 말처럼 이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첫 사목은 별로 신앙이 굳지 못한 양반집 자식 한영익이란 자에 의해 밀고 당했다. 조선조정과 국왕은 즉시 신부를 체포할 것을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명령하였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9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66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