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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교회: 교회는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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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2 ㅣ No.35

[세계 교회는 지금] 스리랑카 교회 : 교회는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

 

 

스리랑카는 실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인도양의 섬나라다. 자주색 짙은 실론티는 이제 길거리 자판기에서도 인기 품목이 되었다. 홍차는 스리랑카의 수출 3위 품목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리랑카에서 얻을 것은 홍차만이 아니다.

 

현재 스리랑카의 가장 큰 문제는 20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타밀족의 무장 독립운동이다. 1983년에 타밀 반군이 스리랑카 경찰 수십 명을 학살한 뒤, 분노한 싱할리족은 콜롬보에서 폭동을 일으켜 타밀족 수천 명을 죽였다. 이른바 ‘검은 7월’ 사건이다. 그 뒤 타밀 반군은 자살폭탄 형식으로 스리랑카 정부에 극렬 저항했다.

 

이 내전으로 6만 명 이상이 죽었고 약 100만 명이 난민 상태에 있다. 이 내전과 관련해서 인도의 라지브 간디 총리와 스리랑카의 프레마데사 총리가 1991년과 1993년에 잇달아 암살되었다. 둘 다 ‘타밀 엘람타이거’라 부르는 타밀 반군의 자살폭탄 테러 때문이었다. 인도는 1989년에 ‘평화유지군’ 형식으로 8만 명을 파병하여 타밀 반군을 공격했다가 1990년에 철수했다.

 

스리랑카는 이 내전으로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국가예산의 20퍼센트 이상이 군사비로 쓰인다. 또 주요 외화 수입원이던 관광산업이 크게 위축되고 해외투자는 거의 중단되어 스리랑카 경제는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체상태이다. 오랜 내전에 지친 양측은 2002년 2월부터 노르웨이의 중재로 휴전을 하고 있다.

 

내전이 시작된 원인은 종교적, 종족적 마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으로 이어지는 300년에 걸친 식민통치 때문이다.

 

 

불교인 싱할리족과 힌두인 타밀족의 싸움

 

싱할리족은 인도의 침략과 압력에 견디어 왔다. 그러나 1697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실론섬의 일부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했으며, 이어 네덜란드를 거쳐 1815년부터는 영국이 실론섬 전역을 장악했다. ‘분할통치’라는 영국의 식민통치 비법은 여기에서도 십분 발휘되었다. 영국인들은 계피, 커피, 야자 농장 등에 인도 남부의 타밀족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물론 이전부터 타밀족이 있긴 했지만 이때부터 타밀족의 수는 크게 늘어 현재는 스리랑카 인구의 18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힌두인이다.

 

그 뒤 스리랑카의 정치는 싱할리족이 타밀족과 연합하느냐 아니면 싱할리족만의 스리랑카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싱할리족은 독립을 위해서는 타밀족과 연합해야 했지만, 한편 타밀족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남의 땅에 들어온” “식민잔재”이기도 했다. 싱할리족의 양대 정당은 타밀족과 공존을 추구하는 세력과 배타하려는 세력으로 구분된다.

 

이는 스리랑카 종교 상황에도 곧바로 반영된다. 1959년에는 강력한 싱할리 민족주의자였던 반다라나이케 총리가 싱할리어를 공용어로 선포했다. 스리랑카는 1948년에 독립했음에도 영어가 국어였던 것이다. 이는 영어를 쓰는 그리스도교인들의 특권을 제한하고 싱할리족의 사회정치적 지위를 높이려는 것이었다. 이른바 ‘싱할리 제일주의’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외된 타밀족은 분노했다.

 

반다라나이케 총리는 곧 정책을 바꿔 타밀족과 공존을 추구하려다 한 불교 승려에 의해 암살되었다. 곧 스리랑카=싱할리족=불교 국가라는 등식을 가진 불교 근본주의인데 인도의 간디가 이슬람인과 연합을 추구하다가 힌두 근본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것과 같은 것이다. 힌두교든 이슬람이든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다 평화와 자비를 가르치지만 그 안의 근본주의자들은 늘 똑같다. 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한다. 그 뒤 불교 근본주의 세력은 스리랑카 헌법에서 불교를 국교로 정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평화의 사도로서 교회의 역할

 

이런 상황 속에서 스리랑카 교회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톨릭 교회는 식민주의자인 포르투갈과 함께 들어왔으며, 영국 식민지 하에서도 여러 특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스리랑카 정부는 모든 사립학교를 강제로 국립화했는데, 사실상 가톨릭이 운영하는 많은 학교가 주요 목표였다. 스리랑카는 독립 이래 영국 식민통치의 잔재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는데 이 또한 이러한 노력의 일부였다. 물론 당시 스리랑카가 제3세계 운동에 적극 나서면서 제3세계 사회주의를 내세운 것도 작용했다. 현재 스리랑카의 정식 국명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이다. 교회의 처지는 결코 좋지 않았다.

 

교회는 결국 수많은 학교를 빼앗기면서 전통적인 주된 선교 기반을 잃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이 때문에 교회는 새로운 생존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소극적으로는 불교와 종교간 대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한편 적극적으로는 내전 상황 속에서 ‘평화의 사도’로서 새로운 위상을 확보할 기회를 찾았다. 역시 교회는 특권이 아닌 가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진면목을 선포할 영성과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콜롬보 대교구의 오스왈드 고미스 대주교는 지난 7월 1일 타밀 반군의 본거지인 자프나에 있는 성 패트릭 대학을 방문한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남부의 싱할리족과 북부의 타밀족 사이에 “평화의 다리”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가톨릭 교회는 싱할리족과 타밀족을 모두 신자로 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스리랑카에는 주교가 8명 있는데 이들 가운데 7명은 싱할리족이고 1명은 타밀족이다.

 

스리랑카의 4대 종교 가운데 그리스도교만이 두 민족 사이에 다리 구실을 할 수 있다. 불교인은 거의 다 싱할리족이고, 힌두인 대부분은 타밀족이며, 약 8퍼센트인 이슬람인은 별개의 종족집단으로 간주된다.

 

특히 가톨릭 교회는 약 10년 전부터 내전을 끝내고자 두 주요 종족 사이에 화해를 촉진시키는 촉매 구실을 자처했는데, 내전 자체가 스리랑카뿐 아니라 교회의 신앙생활 자체에도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었다.

 

스리랑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인 마두 성모성지는 타밀 반군이 장악한 자프나 반도에 있는데, 내전 때문에 싱할리족 신자들은 이곳에 순례를 갈 수 없었다. 교회는 가톨릭인들의 이런 종교적 필요를 들어 정부와 반군 양측을 설득했으며, 마침내 싱할리족 신자들의 순례를 이루어냈다. 또한 마두 성지 자체를 일종의 성역으로 인정하도록 양측을 설득하여 타밀족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이곳에서는 모든 전투행위를 금지하도록 합의를 이끌어냈다.

 

마두 성지는 우리나라에서 명동성당이 휴전선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구실을 해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가톨릭 주교단은 스리랑카 총리와 반군 사령관을 자유로이 만나며 제3자적 중재자로서 존경받는 위치를 굳혔다. 40년 전과는 크게 달라진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경향잡지, 2003년 10월호, 박준영 요셉(아시아 가톨릭 뉴스(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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