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이야기: 참회하는 막달레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7-04 ㅣ No.34

[성미술 이야기] ‘참회하는 막달레나’

 

 

1. 엘 그레코의 「참회하는 막달레나」, 1587~1597년, 109x 96cm, 카우 페라트 미술관. 바르셀로나.

2. 엘 그레코의 「참회하는 막달레나」, 1579~1586년, 104x 85cm, 윌리엄루킬 넬슨 미술관, 켄사스 시티.

3. 엘 그레코의 「참회하는 막달레나」, 1603~1607년, 118x 105cm, 펠릭스 발데스 이자기르 컬렉션, 빌바오.

 

 

막달레나와 세례자 요한의 공통점은?

 

둘 다 광야에서 고행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미술에서는 자주 알몸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답이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숲 속의 세례자 요한」은 알몸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림을 본 사람들이 엉뚱한 마음을 품었다고 하고,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그린 「참회하는 막달레나」는 심하게 벗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들 뿐 아니라 성 예로니모도 광야에 나가면 웃도리를 예사로 벗어 던지고, 성 세바스티아노, 성 아녜스, 성 가타리나도 덩달아 몸매를 자랑한다. 아마 미술의 역사에서 노출 패션을 선보인 것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알몸은 「진실」의 다른 말이다. 진실은 모름지기 한 올의 거짓도 없는 알몸이라야 한다는 「벌거벗은 진실」(nuda veritas)의 재현 전통이 고대의 전통으로부터 종교미술에 스며들면서 15세기에는 성자들도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게 되었다.

 

여자들은 처음에는 목부터 조심스레 드러내다가 차츰 어깨와 등허리로 옷주름이 흘러내리고 급기야는 가슴과 배꼽을 거쳐 둔부와 허벅지까지 시원스레 노출한다. 남자들도 뒤질세라 너나없이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각선미 자랑에 열을 올리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때부터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교회와 세속의 엇갈린 요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한다.

 

 

성서가 말하는 막달레나

 

「참회하는 막달레나」는 알몸의 성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태로운 소재였다. 죄악과 참회, 관능과 정숙의 경계가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신약성서를 들추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막달레나)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온다. 웬만한 제자들은 저리 가라고, 심지어 성모 마리아와 어깨를 겨룰 만큼 기록이 풍부해서 예수님께서 왜 막달레나를 열 세 번째 제자로 삼지 않았나 궁금할 정도다.

 

얼른 생각나는 대목만 꼽아도, 간음의 죄를 저지르고 돌에 맞을 뻔한 마리아, 시몬의 집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마리아, 베다니아에서 예수님의 발에 나르드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낸 마리아, 언니 마르타가 끼니를 준비하는 동안 주님 곁에서 귀기울인 마리아, 죽은 오라비 라자로를 살려 달라고 간청한 마리아, 예수님께서 골고타에 오르시는 고난을 지켜보았던 마리아,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 가운데 마리아, 입관을 앞두고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리아 같은 주제들이 떠오른다.

 

그뿐일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찾았던 사람도 막달레나였다. 어머니 마리아나 베드로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무척 섭섭했을 테지만, 이런 것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막달레나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반가워서 손을 내미는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잘라 말하셨다.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요한 20, 16~18).

 

 

광야에서의 고행

 

화가 엘 그레코는 「참회하는 막달레나」를 여러 차례 그렸다. 엘 그레코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16`~17세기 화가들에게 가장 주문이 많이 들어왔던 주제였다. 그 까닭은 대강 이랬다.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의 개신교 운동이 확산되자 가톨릭에서도 대응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로마에서는 막달레나가 과거를 후회하면서 눈물을 뿌리는 그림을 교화의 수단으로 내세운다. 신앙의 변절자들에게 재개종을 권유하는데 「참회」의 슬로건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막달레나가 광야에 나가서 30년 동안 고행했다는 이야기는 성서에는 없고 「황금전설」에 나온다. 왜 하필 광야를 참회의 장소로 골랐을까? 막달레나 뿐 아니라 많은 은둔 성자들이 그랬다. 광야는 예수님께서 고행하시며 시험을 받으신 적도 있지만, 그보다 앞서 아담과 하와가 처음 자신들의 삶을 개척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서 광야는 도시의 반대말이다. 도시와 전원, 문명과 자연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일반화된 근대의 사상이다. 도시가 인간이 지어 올린 유혹과 죄악을 상징한다면 광야는 그것의 속죄와 물림을 의미한다. 땅은 용서하고 치유하는 모성이요, 무한히 인내하는 생명의 품으로 보았다.

 

 

엘 그레코의 그림

 

엘 그레코는 자연의 품에 돌아가서 참회하는 막달레나를 그렸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스산한 풍경이다. 인적도 보이지 않는다. 막달레나는 바람이 씽씽부는 추운 겨울을 남루한 겉옷 한 벌로 지낼 모양이다. 몸을 비스듬히 젖히고 있지만, 우리가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깝다. 막달레나의 파리한 입술과 시린 눈망울에는 슬픔이 짙게 묻어있다. 금세라도 눈물이 굴러 떨어질 것 같다.

 

막달레나는 오른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감싸쥐었다. 시선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응시한다. 앞에 놓인 해골은 죽음의 단호한 표상이다. 막달레나의 왼팔은 육신과 죽음이 한 매듭으로 묶여 있다는 덧없음의 교훈을 설명한다. 뒤쪽 벼랑에는 인동넝쿨이 한 가닥 붙어 있다. 시련을 이기는 기도의 생명력을 이런 식으로 표현 한 것이 아닐까? 배경에는 푸른 구름이 어지럽게 춤춘다. 죄 많은 기억이 꼬챙이를 휘둘러서 먼 곳의 구름을 휘저어놓은 모양이다.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는 예사로운 풍경조차 내면의 기억을 반영한다.

 

막달레나의 이름을 풀면 「비탄의 바다」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비탄의 눈물이 후회의 바다를 씻어준다』라고 읽으면 어떨까?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10일, 노성두]



1,68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