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유한숙과 윤유오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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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49

신유박해 순교자들 (18) 유한숙과 윤유오 야고보


이 아가다 동정생활 도우며 세속쾌락 버리고 기도묵상

 

 

대왕대비의 천주교 박해령이 내리자 조정의 대신들은 일제히 그동안의 온건책을 버리고 천주교도를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잇달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정약종의 심문에 참여하였던 영부사 이병모는 "이들 흉악한 역적의 경우는 남을 죽이는 것보다 그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며 "엄히 심문하여도 한결같이 진술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완고하기가 목석과 같다"고 하면서 이들을 엄형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1801년 2월 지중추부사 등 현직관리 수십 명이 연명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올려지고 이미 지목된 신자들에 대한 심문과 탄핵이 가중되는 가운데, 앞서 본 바와 같이 2월 26일에 정약종을 비롯하여 최필공, 이승훈, 최창권, 홍교만, 이존창, 홍낙민이 처형됐다. 이때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사하였으며 정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장기현으로 귀양가도록 확정됐다. 이들의 박해를 자세히 알아보면, 서울에서의 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정약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 당하였고, 이 무렵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무명의 순교자와 함께 청주에서 잡힌 이종국은 공주에서 처형당했다. 경기도 포천에서는 홍교만이 아들 홍인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아버지 홍교만이 먼저 서소문 밖에서 정약종과 함께 순교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주에서는 일찍이 부활찬미경을 함께 부르다 잡혀온 신자들이 이때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이 확정된 후 각자의 고향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는데 원경도, 임희영, 최창주, 이중배, 정종호 등이 그들이다. 이때 함께 체포된 조용삼은 옥사하였다. 이후에도 대왕대비는 박해를 멈추지 않고 아직도 숨어있는 서학도를 조속히 체포하라고 독려하고 나섰다.

 

그러자 음력 2월 30일에 좌부승지 김근순은 홍낙임, 송문로, 유기주 등을 탄핵하였다. 이로 인해 송문로는 전라도 녹도진으로 유기주는 진도군 금갑도로 유배되었고, 3월 10일에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부로 오석중은 전라도 영광군으로 각각 정배되었다. 그런 다음 특별한 혐의가 더 드러나지 않자 박해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듯하다가 3월 14일 주문모 신부가 자현하여 자수함으로써 박해는 새로운 국면을 띄며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자현과 순교하기까지 즉, 주신부가 의금부에서 심문과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지방인 양근에서는 유한숙과 윤유오 등 13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정철상, 최필제와 중인출신인 정인력, 윤운혜, 정복혜, 이합규 등 6명이 처형되었는데, 이제 신유박해의 새로운 국면의 전개에 앞서 이들 중 몇 사람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한다.

 

먼저 유한숙(兪汗淑, ?~1801년)이다. '사겸'이라고도 불리던 유한숙은 경기도 양근지방의 동막골에서 살던 향반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입교한 뒤 한동안 친척인 동정녀 이아가다의 동정생활을 돕기 위해 그를 보호하며 외교인들의 눈을 피해 서울의 윤점혜 아가다에게 데려다 주기도 했다.

 

그는 양근의 유력한 신자로서 누구보다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속의 쾌락을 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신심을 굳혀나갔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경기도 감사인 이익운으로부터 심문과 형벌을 달게 받고 끝내 배교하지 않아 사형판결을 받고 고향인 양근의 길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는 가운데 참수형을 당하니 그때가 1801년 음력 3월 13일이었다. 유한숙이 참수형을 당할 때 함께 참수형을 받은 사람이 윤유오(尹有五, ?~1801년) 야고보이다. 이때 양근에서는 7명의 신자가 함께 체포되었는데 모진 형벌 속에도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사람은 유한숙과 윤유오 둘 뿐이었다.

 

유한숙과 같이 윤유오 또한 그에 대한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어서 그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의 집안은 본래 경기도 여주지방의 양반이었고 양근으로 이사한 다음 그가 태어났다. 집안 전체가 열성적인 천주교 신자였으니 그도 일찍부터 가족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양반으로 세속적 복락을 누릴만했던 그의 집안은 천주교 신앙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가족들을 한국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의 사촌 형인 윤유일 바오로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1795년 6월 28일에 순교한 한국교회 초대역사에 높이 기억될 순교자이다. 동정녀로 유명한 윤점혜 아가다는 그의 사촌누이로서 순교자이며,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부친 윤장은 임자도로 귀양갔고 숙부 윤형은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는 고문 중에 옥사하였다.

 

이렇듯 그의 가계는 온통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파산되고 희생된 그러나 놀라운 신앙의 증거자들이었다. 윤유오는 이러한 증거자들의 가족답게 모진 형벌과 심문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마침내 고향의 신앙동지인 유한숙과 함께 고향 땅 큰길가에서 고향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참 삶의 길을 목숨 바쳐 증거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15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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