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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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홍인 레오 - 아버지 홍교만 뒤따른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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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42

신유박해 순교자들 (12) 홍인 레오


아버지 홍교만 뒤따른 효자, 오랜 옥고로 온갖 고초겪어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1801년 1월 10일, 음력)으로 시작된 신유박해는 그 해 12월 22일(음) 척사윤음으로 끝날 때까지 두어 단계의 전개과정을 볼 수 있다. 그 시작은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통해 시파와 벽파의 당파간 권력다툼인 정치성을 띄고 있었다. 그래서 정치적 반대파의 희생이 크게 부각되고 주로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에서 희생자를 냈다.

 

그러던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박해는 더욱 가열되고 확산되었다. 전라도에서는 3월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 집안 인척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을 문초하던 중에 서양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이 탄로되었고, 이 계획에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이 관련되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 조선조정에서 새로운 국면의 의구심을 갖게 했는데, 그 해 9월에 황사영이 체포되어 발단된 백서사건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게 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실정을 말하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천주교가 국가전복을 음모하려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정리해 보면 주문모 신부의 자수사건 이전까지는 천주교 문제를 정치적 투쟁의 방편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더 컸었는데, 주문모 사건 이후에는 유항검이 서양선박을 불러들이려 했다는 소위 대박청래사건이 드러나고, 이어서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노출되면서 이제 천주교 문제는 조선왕조의 운명과 관련된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유박해의 희생자를 황사영의 백서에서는 3백여 명이라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방의 희생자와 그 자신 및 백서사건에 연루된 희생자들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니 희생자는 적어도 3백명 이상이고 처형된 사람만도 1백여명인데 여기에 유배된 사람을 약 4백명으로 보면 도합 약 5백여명에 달한다. 그러니까 신유박해 희생자는 3백여명 이상이고 5백여명 이하가 되는 셈이다.

 

이제 초기의 경기, 충청도 지역 순교자를 보면서 비록 그의 사형집행은 늦게 이루어졌으나 일찍이 아버지와 함께 체포당한 홍인(레오, 1757~1801)을 먼저 본다. 홍인 레오는 아버지 홍교만 프란치스코(가톨릭신문 제2247호에 소개)와 함께 2월 14일에 잡혀 포천 옥으로 이송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한 홍인은 포천고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젊은 시절 가문과 지위를 이용하여 인간적 명예를 얻고 출세하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던 그가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고 받아들여 신자가 된 후로는 일체의 세속적 출세를 버리고 오직 하느님을 섬기며 그 교리를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효성이 지극하던 그는 아버지 홍교만이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서도 입교하기를 주저하며 확신을 갖지 못함을 보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아버지가 가졌던 교리상의 의심을 풀어드리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아버지는 그의 열성에 모든 의심을 풀고 굳은 신앙으로 입교하게 되었고, 그는 아버지에 이어서 다른 식구들에게도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그는 특히 냉담교우들에 대해서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힘차게 격려하였다. 이렇게 그는 냉담자 회두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더불어 많은 외교인들을 입교시키기도 했다. 홍인 레오가 이렇게 사도적 열의에 불타는 모습으로 복음선교에 진력하면서 보여준 그의 겸손은 모든 이들을 감복하게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가장 겸손한 말밖에는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장점과 재주와 착한 행실에 대하여는 돋보이게 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우러러 볼 만 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그의 겸손에 대해 특별히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아버지와 함께 체포당하여 옥에 갇혔다가 고향으로 이송되어 고향의 관아에서 신문 받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 때 아버지 홍교만은 먼저 사형언도를 받고 순교한 뒤였다. 그는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자기 자신을 입교시켰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열의와 효성으로 그의 마음을 굳건하게 지탱해냈다. 이러한 그의 용기와 인내를 보고 포졸들이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갖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서 더욱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님을 위해 사형판결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었다. 1801년 12월 27일(음) 그는 포천에서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대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참수 순교하였다. 홍인 레오는 그의 가문과 인품으로 보아 당대를 능히 풍미하며 출세하여 세속의 행복을 누릴 만 했다. 그러나 그는 세속의 모든 영화를 뒤로하고 44세의 약관으로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며칠 동안 놀랍게도 시신이 살아있는 것같이 보였고, 그 주위에는 밝은 빛이 어리어 있었다고 한다. 포졸들과 많은 외교인들이 이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는 크게 놀라워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3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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