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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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김백순: 내 마음은 마치 산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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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9

김백순 - 내 마음은 마치 산과 같다

 

 

순교자 김백순(1769(?)-1801년)은 노론 대가의 선비로 본관은 안동이며, 김건순 요사팟의 사촌형이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에 척화를 주장하고, 1639년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여, 이듬해 심양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좌의정을 역임했던 김상헌의 후예이다. 나라와 임금께 바친 선조의 충성으로 그에게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그 후손에게도 정문을 세울 허가를 받았다. 해마다 임금은 병자년에 절개로 죽은 이의 자손들을 거느리고 진배의 예를 행하였는데, 예가 끝나면 제사에 참례한 사람들에게 ‘충량과’라는 과거를 보게 하였다. 이렇게 그에게는 빨리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었다.

 

김백순은 명문가의 후예였지만 서울에서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가난을 면하고 영예를 얻기 위해 벼슬길로 나갈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순전히 출세하려는 야심으로 글공부에 전념하였는데, 동양 성현들의 철학서를 공부하면서 차츰 그 철학적 이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모호하고 모순되어 의심과 혼란에 빠졌다.

 

회의와 혼란에 빠진 그는 성현의 글귀라 하여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마침내 사물과 인간의 궁극적 가치와 의의에 대해 사색하며 진리에 목말라했다.

 

정문이 세워진 명문가의 후예로 가난을 이기고 출세해 보려던 김백순은 당시 세상의 어지러움을 보고 참된 진리에 목말라하면서 벼슬길에 나갈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이제 해마다 임금이 절개로 죽은 이의 자손들을 거느리고 진배의 예를 행하고, 충량과를 보게 하던 제사에 참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제사에 참례하지 않는 까닭을 "주나라를 존중하는 정성이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오. 오늘날 제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만 엿보는 것이니, 그것은 매우 성실하지 못한 일이오. 그래서 나는 참례하지 아니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참 진리에 목말라하던 그는 노자와 장자의 책을 읽었다. 그는 노장의 무위자연과 신선사상을 접하면서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데 주목하고, 이에 그가 그 동안 생각했던 바를 가지고 나름대로 새로운 이론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죽어도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기초를 두고 새로 만든 이론을 친구들을 찾아가 강설하였다. 그런데 그의 설명을 들은 친구들이 "자네 말은 매우 이상한데, 자네는 아마 그 모든 것을 서교에서 따왔지?" 하고 대답했다. 친구들의 지적은 김백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너무나 놀라워하며 ‘우리의 지능을 초월하는 나의 새 이론을 듣고는 모두가 그것이 서교에서 왔다고 하니 그 종교에는 무엇인가 아주 위대하고 비상한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김백순은 '나는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고 하니, 반드시 미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 틀림없는 서교를 알아보리라.' 결심하고 천주교에 진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사귀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했다. 불사불멸하는 영혼의 존재, 상선벌악, 천주존재와 강생구속 등 천주교 주요 교리를 연구하며 그는 비로소 종교적 진리에 대한 오랜 갈증을 풀었다. 그리고 그 진리가 갖는 한없는 매력에 끌려들고 그 진리가 주는 놀라운 생명력에 취했다. 두 해에 걸친 그의 연구 결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는 스스로 확신을 가졌다고 느끼고 굳게 믿기 시작하며, 온 마음을 바쳐 천주교가 명하는 모든 본분을 충실히 지켰다.

 

이제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신자가 된 김백순은 성실하고 정성어린 권고로 그의 어머니를 신자가 되게 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아내였다. 원래 야심이 많았던 아내는 항상 남편의 출세와 영예를 기대하며 갈망해 왔다. 그런데 과거 준비로 공부하던 남편이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문제에 관심을 두더니 마침내 서학도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껴 분노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실망과 분노는 남편을 비난하고 욕설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김백순은 너그럽고 침착하게 아내의 반항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친척 중 어떤 사람이 그에게 천주교에 대해 묻자 그는 힘차게 "이것은 참되고 위대한 도리요, 사람은 누구나 따라야 하니 나같이 하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아내는 김백순을 벼슬길로 가도록 백방으로 손을 썼다. 아내는 친정 어른의 도움을 청했다. 어느 날, 외숙부가 그를 보러 왔다. 외숙부는 김백순을 타이르고 유혹하여 천주교를 버리고 출세의 길을 택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대는 충절과 명문가의 후예가 아닌가. 나랏님도 그대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특은을 베풀고 계시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입신출세하여 가문의 영예를 보전하고 나라에 충성하려 하지 않는가. 오히려 국법을 어기고 사학에 심취하니 어찌 군자의 도리인가."

 

김백순이 답했다. "나는 사학에 물든 바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믿고 있는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만민이 믿어야 할 참 종교입니다. 세상에 누구도 부모에 효도하고 임금께 충성함을 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느님은 천지대군이시고 만민의 참 어버이십니다. 천지대군께 충성하고 참 어버이께 효도함을 금할 군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외숙부의 온갖 논지와 이설이 김백순의 도도한 논리를 당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해도 말을 듣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외숙부는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끝내 듣지 않으면 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 김백순은 "내가 차라리 숙부와 의절을 하더라도 결코 천주와 의절은 못하겠습니다." 하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친구들은 그와 상종하지 않기로 하고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통고하였다. 그의 친척들은 그를 집안에서 내쫓기로 결정하고 문중에서 축출하였다. 이렇게 현세의 모든 것들이 그를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이 용감한 신입교우인 김백순은 오히려 태연하였다. 모두가 그를 떠난다는 통보를 해올 때마다 "내가 천주를 안 뒤로는 내 마음이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아니하니, 내 마음은 마치 산과 같다."라고만 말하였다.

 

1801년 봄, 김백순은 밀고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그는 금부에서 모진 매를 맞으며 심문을 당했다. 그는 굳건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다가 늙으신 어머니와 영원히 결별한다는 효성에 못 이겨 잠시 허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금부로 이송되어 배교를 취소하고 신앙을 고백하여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는 끝내 세례성사를 받지 못한 예비신자로 1801년 5월 11일 참수형을 받고 32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예를 얻었다. 그의 순교는 피로 씻는 혈세가 되었고, 혈세는 그에게 개선의 교회로 들어갈 영광스런 권리를 주었다.

 

[경향잡지, 2000년 12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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