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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조 토마스: 극기로 순교를 준비한 증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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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8

조 토마스 - 극기로 순교를 준비한 증거자

 

 

지극한 효성으로, 귀양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 모시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조(趙) 토마스는 나이도 알 수 없으며, 다만 조동섬 유스티노의 아들 로만 알려져 있다.

 

조동섬은 양근 출신의 덕망 높은 한학자인데 한국 초대교회의 열렬한 신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1800년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801년 2월에 다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해 2월 27일 의금부에서 그를 경기 감영으로 보냈는데, 불행히도 그는 나약한 모습으로 배교의 뜻을 나타내어 유배형을 받았다.

 

아버지가 이렇게 옥고를 치르며 문초를 받고 유배형이 내려질 때, 비로소 그의 아들인 토마스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훌륭한 성격과 효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된 뒤로 그는 교회의 모든 본분을 정확히 지켜 그를 아는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덕행을 쌓고 영적 정진을 하면서도 조용하고 겸손하게 아버지의 후광 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00년 아버지가 처음 체포당하였을 때, 그는 옥에서 10리 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두 번씩 찾아뵙고 음식을 갖다드리며 힘을 다해 위로해 드렸다. 사람들은 이 지극한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그의 효성에 머리를 숙였다.

 

1801년 아버지가 다시 체포당하고 마침내 30년 유배형을 받아 함경도 무산으로 떠날 때, 토마스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밤이고 낮이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유배지인 무산까지 멀고 험한 길을 아버지를 모시는 데만 전념하여 동행하던 포졸이 감복하게 하였다.

 

유배지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옥고와 형벌의 상처가 덧나고 여행의 피로가 겹쳐 중병이 들고 말았다. 조 토마스는 아버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정성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며 섬기어 모셨다. 유배지인 무산 사람들도 또한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토마스의 지극한 정성과 기도가 효험이 있어 아버지는 기력을 차려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경기 감영에서 나약한 모습으로 배교한 것을 통탄하며 뉘우쳤다. 토마스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회심에 감복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온갖 규범과 계명을 엄하게 지키며 귀양살이의 어려움을 이겨냈다. 부자는 그 험한 귀양지에서 기도하며 회개의 삶을 사는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외롭고도 아름다운 귀양 생활이 곧 끝이 나게 되었다. 당시 양근 군수는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조동섬과 그의 아들을 기어코 없애려 했다. 조동섬이 귀양가고 아들이 아버지를 모셔 집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게 되자 군수는 여러 차례 대신들에게 청원을 냈다. 결국 몇몇 친구의 힘을 얻어 필요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평소에 그가 아들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한 대로 포졸을 파견해 토마스를 잡아오게 하였다.

 

그해 8월에 양근의 포졸들이 무산에 들이닥쳤다. 불편하고 어려운 가운데에도 회개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부자는 놀라고 황망하여 가슴이 메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조용히 주님의 섭리를 받아들여 따르기로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래, 너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하고 물었다. 토마스는 늙으신 아버지를 이 귀양지에 혼자 버려둘 수밖에 없는 처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섭리를 따라야 했다. '이것이 주님 뜻이라면 기뻐해야 한다. 떠나야 한다면 아버지께 슬프고 괴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토마스는 대답하였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 발 한 발 따라가는 것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아들의 이 침착한 대답에 아버지는 마음 든든한 듯이 "좋다. 이제는 네가 떠나는 것을 후회없이 안심하고 보내겠다."고 하면서, 이제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했다.

 

아들을 떠나보내고, 그것도 포졸의 손에 죽음의 길로 떠나보내고 조동섬 유스티노는 유배지에서 더욱 열절한 신앙생활을 했다. 늙고 병들어가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천주교 교리를 전수해 줄 젊은이를 찾고 싶어했다. 뒷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소원을 이루어주신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며 정하상을 격려하면서 교회의 재건과 사제 영입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였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그에게서 배우고 또 그가 소개해 준 조숙의 집을 활동 근거지로 하여 놀라운 활약을 해나갔다. 조동섬 유스티노는 1830년 8월 2일 92세로 유배지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뉘우침의 삶으로 그의 소원을 정하상 성인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실현한 셈이다.

 

토마스는 아버지를 두고 떠나온 쓰라린 가슴을 순교의 열망으로 달래며 양근에 도착했다. 양근 군수는 오랜 소망을 이루게 된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초를 시작했다.

 

"그래, 네 아비의 죄를 아느냐?" 토마스는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대답했다. "사또께서 어떻게 인륜을 무시하고 그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제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가 당하시는 고통은 제 잘못 때문이지 아버지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이 효성 지극하며 사리가 분명한 대답에 양근 군수는 내심 놀라워했다. 그러나 오히려 화를 내며 혹독한 고문을 하며 배교하라고 강요하였다. 오랜 영적 수련으로 살아온 조 토마스는 배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끈기있게 모든 고문을 참아 받았다.

 

토마스는 근 두 달 동안 거의 날마다 끌려나가 신문을 당하며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시도 나약함을 보인 적이 없었다. 놀라운 그의 정신은 굽힐 줄 모르고 더욱 힘차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의 의연한 자세와 초인적 인내에 모두 탄복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거듭되는 형벌을 더 견디지 못했다. 칼날 아래 순교하기를 열망했던 그는 1801년 11월 중순경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토마스의 순교 사실을 전해준 사람은 그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순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잡히는 것을 허락하셨을 때 형벌을 받는 데 익숙해지려고, 여러 해 전부터 혼자 있는 틈을 타서 자기의 팔다리를 몹시 쳤다고 한다. 아마도 이 용감한 극기를 상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순교의 영광을 주신 모양이다."

 

신앙생활이 드러나면 체포당하고, 잡히면 모진 형벌을 견디지 못해 본의 아니게 주님을 배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인 박해시기에, 스스로 몸을 쳐 극기하는 순교자들의 모습을 조 토마스를 통해 보면서, 너무도 나약한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조용히 반성한다.

 

[경향잡지, 2000년 11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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